역할 바꾸기를 증명하는 20대 국회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헤겔의 변증법은 정(正),반(反),합(合)으로 이루어진다. 원래의 상태를 정이라 한다면, 이 '정' 상태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반'이 등장한다. 이두 개념이 부딪침으로써 결국은 '합'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는 이론이 변증법인 것이다. 흔히 헤겔의 변증법은 정치 체계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많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여당이 있으면 그에 반대되는 야당이 있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 이 둘의 지위를 바꾸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합', 역할 바꾸기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결국 정치는 영원한 여당도 야당도 없는 권력의 역할 바꾸기 밖에 안 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드라마 '쾌도 홍길동'과 봉준호 감독의 '설국 열차' 통해 설명해 보겠다.
'쾌도 홍길동'의 '정'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과, 광휘라는 폭군에 살해된 것으로 기억되는 죽은 왕자 '이창휘'이다. 이들은 합심을 하여 '서자의 난'을 통해 세상을 뒤바꾸려 한다. 이들에게 '반'은 기존의 기득권 세력, 폭군인 광휘이다. 결국 '정'은 '반'을 몰아내는데는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도래하였을까. 국무총리직에 오른 홍길동은 가히 개혁이 아닌 혁명적인 정치를 시행한다. 그는 양반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면 그들에게 기초군사훈련을 시킨다. 당연히 왕인 이창휘에게 상소가 끊이지 않는다. 홍길동의 행동은 점차 새로운 '반'으로 여겨진다. 이 둘은 점차 서로의 이상향이 달랐음을 느낀다. 결국 이창휘는 홍길동과 활빈당 패를 모두 죽인다. 어차피 새로운 정치를 꿈꾼 이창휘 또한 다른 역할 바꾸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이 역할 바꾸기에 대한 어떠한 결론을 내렸을까. 꼬리칸의 하층민들은, 즉 '정'은 점차 앞칸으로 이동하는 정치 개혁을 시도한다. 그들에게 앞칸 지배계층은 '반'이다. 하층민들이 앞칸에 가서 '합'을 이루었을까. 그렇지 않다. 결국 감독의 선택은 열차를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로 상징인 철로 만들어진 기차 안에서, 애초에 앞 칸으로의 이동(계급 투쟁)은 역할 바꾸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하층민 사이에서도 먹는 음식이 다르다. 어디에서나 계급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인 태초의 공동체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 장면에 어린아이들과 자연으로 상징되는 곰으로 끝나는 것은 이런 의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정치가 결국은 역할 바꾸기라 한들 난 희망을 갖고 싶다. 바로 20대 국회에게 거는 기대다. 어제 20대 국회가 개원을 하였다. 국민들의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헬조선','N포세','인구절벽'이라는 이 사회를 걱정하고 조롱하는 단어들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얼굴이 되었다. 희망을 이야기하기 앞서 생존의 한숨을 내뿜고 있다. 젊은이들은 내일을 꿈꾸지 않고, 가정은 붕괴되고 있으며, 노년은 쉼이 아닌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격론을 하고, 희망을피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바란다면 나만의 욕심일까. 정치가 결코 역할 바꾸기, 이번엔 '가가 가가' 아니었음을 20대 국회가 꼭 보여줬으면 한다. 신문을 대충이라도 보고, 정치 기사에 댓글이라도 달면서 내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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