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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J에게

 J에게

 

 그래, 너도 인정하겠지. 오늘은 선을 넘었다는 걸 말야.  몇 개월만애 통화를 하면서 떨리긴 했어. 드디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뱉어냈지. 의외로 너의 반응이 차분해서 놀랐어. 1단계는 그런대로 무사 통과였지. 그러더니 역시나 여자친구의 나이를 물어왔지. 너 몰래 수화기 넘어로 심호흡을 했어. 준비했던 순간이지만 역시나 쉽지 않더군. "12살"의 ㅅ과 ㅏ의 결합 후 종성 ㄹ을 붙이기도 전에 넌 왓더뻑을 외쳤지. 그리고 오미갓과 지저스를 찰지게 발음하며 팔든미라 소리쳤지. 여기까지는 참았지만, 주님의 어린양을 새길로 인도하겠다며 여친의 전화번호를 묻는 건 아니었잖아. 불혹도 띠동갑이랑 사랑할 수 있다는 말에, 넌 유독 "사랑"이란 말을 몇 번 되뇌이었지.

 

 자꾸 그러지마라. 회사의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해서 사내 연애를 시작했는데 어쩌란 거야? 그냥 받아들여. 너 자꾸 극우보수 꼴통 새끼라 하면 그 땐 나도 깡패가 될 수 밖에 없어. 경고한다 이 좌빨 빨갱이야. 아, 다만 나도 알고 있어. 내가 평소 결혼 따위는 필요없다며 비혼주의인 척을 했다는 것을 말야. 솔직히 말해봐, 내가 독거노인으로 골골대다가 죽는 게 낫냐, 그래도 너에게 삼촌이라 부를 조카 몇명 만들어주는 게 낫냐? 너도 내가 연애한다고 했을 때는, 앞으로 잘 될 거라는 안도감도 들었을 거야. 경찰인 우진이도 범죄가 아니라 했어. 대한민국 공권력의 공식 인증을 얻었으니 너도 어서 승인을 해 주기 바란다. 뭐 그게 나의 사랑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야.

 

 혹시... 나에게 부럽거나 질투심을 느끼는 건 아니겠지. 내 신세를 봐봐. 재수까지해서 대학교를 옮겼지만, 행정고시 전전하다 시간 다 보내고... 결국은 군대 아닌 방위가 되었을 때 니들은 예비군이었지. 기억 날거야. 고등학교 동창 놈들은 죄다 예비군으로 훈련할 때, 나는 읍사무소 공익요원으로서 니들한테 총을 나눠줬던 거. 지금 모두가 떠난 고향을 내가 지키고 있잖아. 기껏 서른 너머 서울에 취직했는데, 인구 고령화를 이유로 고향 지사에 나를 차출시켰지. 내가 20년을 넘게 살은 이 삼보빌라로 돌아왔을 때의 좌절감을 너는 결코 이해 못할거야. 모든 걸 포기한 이 순간에, 드디어 내 짝을 찾은 것이지. 얼마나 다행이냐 친구야.

 

 예식장 빨리 잡으라 했는데 내가 무슨 모아 놓은 돈이 있냐.(비트코인 묻지 말라니까) 그래도 겨우 잡은 기회이니만큼 결혼까지 어찌 가보도록 할게.(왜 니 결혼식 늦게 간 이야기가 나와) 이번 가을 추석에 고향에 오면 재수씨랑 한 번 보자.(형수 아니라고) 건강 잘 챙기고 너무 야근 많이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럼 난 50일 기념 선물 사러 갈게.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