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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30일 글쓰기 - 20] 가방 없는 날

 

가방 없는 날

 

요즘 들어 출근길이 힘들다.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일을 하기 싫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출근길이 더 버겁다. 나는 극구 부인을 했는데, 아내는 1분만에 침대에 곯아 떨어진 내 모습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 화요일 아침에 생각한 것이 가방은 없는 출근길을 선택했다. 몸무게는 줄일 수 없으니까 가방 무게라도 줄여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가방에 중요한 서류도 없었고, 장식품이 된 지도 오래된 것 같았다. 가방에 넣어야 할 이어폰케이스와 지갑을 점퍼에 넣어야 해서 신경이 쓰였지만, 이제는 빈 가방의 내겐 너무 중장비였다.

 

가방 없이 나서는 출근길은 상상보다 훨씬 좋았다. 특히, 내가 압축 파일(.zip)이 되어 압축률 120% 을 견뎌내야하는 지하철에서 너무 좋았다. 가방에 다른 사람들이 안 걸리니, 문 바로 앞의 가림막에 기대 서서 선잠을 자기가 편했다. 생각보다 빈 가방의 무게는 나한테 컸던 거 같다. 어깨의 부담도 없으니 그나마 출근길이 홀가분했다. 다만, 우려했던 문제가 터졌다. 퇴근길에 가방이 없는 걸 후배가 알아차렸다. 평소 가방을 안 가져오다가 그날만은 왜 가방을 가져왔는 내가 더 궁금했던 그 후배는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어찌 회사에 그렇게 껄렁하게 올 수 있냐면서 농담을 했다. 혹시나 했던 약점을 지적받으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초등학교 때 , 교실 뒤편에 철제 사물함이 생겼을 때다. 몇몇 혁신가들은 모든 책들을 개인 사물함에 박제를 해 주고 가방 없이 다녔다. 언제나 같은 편이었던 교사회의와 어머니회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히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생이 어찌 책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냐는 것이었다. 소심했던 나는 이 말이 좀 맞는 거 같아서 가방은 가지고 다녔다. 또한, 역대 최악의 인신모독 면접관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우연히 지하철에 보게 되었다. 가방없이 출근하는 모습이 그렇게 껄렁하게 보일 수 없었다. 저런 사람이 중역으로 일하는 회사는 떨어진 게 천운이었다고 안도하기까지했다. 이렇게 난 가방을 놓고 다니는 것에 보수적인 논조를 가지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난 매주 금요일은 가방 없는 날로 정했다. 나름의 타협이자 내게 주는 선물의 날을 만든 것이다. 금요일은 왠지 회사 사람들의 차림새도 캐쥬얼하다.(그걸 내가 선도하고 있지만..) 불금의 날에는 가방 정도는 없어야 어울릴 것 같았다. 일주일의 갖은 고생에 대한 보답 정도로는 소박하기도 하다. 원래 지금의 가방은 원래 취업 면접이 있는 날만 꺼냈던 면접용 가방이었다. 그만큼 아꼈다. 이 가방을 들고서 출근길을 그렇게 소망했는데, 이제는 변심을 저질렀다. 뭐 어떤가.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나 또한 '소확행'하나 가지겠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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