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등급'. 중학교 1학년 5월, 체력장 집합 장소인 운동장으로 등교하는 내내 이 숫자만 생각났다. 초등학교 5학년 2반의 어머니회가 있던 날, 어머니는 속셈 학원에 갔다 온 나를 작심한 듯 안방에 붙잡아 앉혔다. 담임 선생님이 비밀스럽게 어머니께 밝힌 내 체력장 결과가 5등급이라 하셨다. 난생처음 알게 된 체력장 등급에, 나는 5등급이 정도면 높다고 했고 어머니는 1등급과 너무 멀어 문제라 알려 주셨다. 우리반에 고도 비만으로 놀림 받는 재훈이도 5등급이라 했다.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 11시 넘어 술에 취해 집에 온 아버지는 기죽은 내 표정에 별 거 아니라 하였지만, 어머니 성화에 런닝 셔츠 차림으로 팔굽혀펴기 시범을 보여야했다. 체력이란 것도 성적과 같이 부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굽혀진 두 팔은 상체를 들어 올리기에 힘이 없어 바들바들 떨기만 했고, 결국에 1개도 못하고 잠들었다.
중학교에 올라와 첫 체력장 날짜가 발표되자, 아이들은 모두들 신나하였다. 중간 고사 성적보다도 체력장을 더 고대하는 눈치였다. 남자 중학교에서는 신체 능력이 곧 서열이었고, 체력장 결과가 그 기준을 명확하게 부여해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난 체력이 약한 아이였고, 그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겼다. 어머니는 내가 돌 전부터 잔병치레가 너무 많아, 동생을 기르기 전까지 아기는 아픈 게 당연할 줄 알았다고 하셨다. 거기다 내성적인 성격에 공부도 곧 잘 하였는데, 이런 유형이 체력까지 좋은 경우는 내 주변부터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찾을 수 없었다. 체력장 날, 난 평소보다 일찍 끝난다는 기대에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체력장에 임하는 아이들은 무거웠다. 그 중 100m 달리기는 우리들 사이에서 체력장의 꽃으로 여겨졌고, 어느 덧 내 차례가 되었다.
체육 선생이 준비하라 했지만 특별히 준비할 건 없었다. 출석부 번호와 이름을 외치며 밀가루로 만든 하얀 출발선에 서면 끝이었다. 41번인 난 왼쪽 코스, 42번은 오른쪽 코스였다. 앞서 뛴 조의 상황을 살피며 체육 선생은 우리를 보고 무심히 깃발을 올렸다. 출발 자세를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난 왼발은 출발선을 기준으로 45도 정도 틀어 놓았고, 오른발은 왼발에서 어깨 넓이로 떨어진 지점에 발끝과 발바닥만 땅에 대었다. 세 번 정도 가볍게 양 무릎을 굽혔다 편 후, 왼팔은 왼쪽 허벅지 앞에, 오른팔은 살짝 접어 등 뒤로 뺐다. 분명 육상 출발 자세를 취했는데, 쇼트트랙 선수의 스타트 자세와 똑같았다. 다행히 곁눈질로 본 42번도 내 자세와 비슷해 안심이었다.
곧, 양 눈동자가 깃발과 결승점을 번갈아 확인하며 바빠지기 시작했다. 100m 달리기니 분명 결승점은 내가 서있는 이곳부터 정확히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야 했다. 그런데 저 끝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고, 사막의 신기루처럼 실체를 확신할 수 없었다. 여기에 중학교 운동장은 도민 체육대회를 수용할 정도로 크고, 관중 스탠드로 둘러 쌓여 있어 흡사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았다. 비장한 분위기에 심장 소리도 덩달아 빨라시지 시작할 무렵, 빨간색 깃발이 경쾌하게 공기를 갈랐다. 그와 동시에 난 오른발부터 치고 나갔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42번보다는 빠른 출발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체육시간에 배운 달리기 이론은 세 가지였다. 첫째, 팔을 움직이면 다리도 함께 움직인다는 것, 둘째는 발바닥으로 지면을 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상 운동화에 도돌도돌한 스파이크가 발바닥에만 있는 원리였다. 마지막은 달리는 동안 가급적 숨을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육상 선수들이 달리는 동안에 양 볼이 심하게 출렁이는 것이 숨을 참고 있어 산소가 부족해 생기는 현상이라 했다. 이론에 따라 양팔을 모두 직각으로 굽힌 후 번갈아 흔들었다. 왼손이 오른손보다 앞으로 나서면 냉큼 오른손을 왼손 앞으로 향했다. 발 뒤끔치가 땅에 닿지 않도로 발바닥으로만 달렸다. 다만 너무 힘들어 숨 참기는 포기했다. 30m를 가기 전에 목구멍으로부터 뜨거운 공기가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양 허벅지는 벌써부터 터질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달린 거리보다 달려갈 거리가 많았다.
그러다 문득, 42번이 한 번도 내 옆에 보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50m 지점부터는 트랙 옆의 스탠드에서 먼저 뛴 반 친구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콜로세움에 난 검투사고, 그들은 로마 귀족이었다. 그들은 엄지손가락을 땅을 향하며 나를 조롱할 것 같았다. 부끄러워 더욱 팔을 흔들었다. 생각과는 반대로 '저 자식 빠른데'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달리면서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이제 절반도 안 남았기에 하던 동작을 계속했다. 그렇게 100m 결승점에 통과하였고, 가속도 때문에 10m 정도는 더 가서 멈출 수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나에게 체육부장은 스톱워치를 가리키며 13초 30이라 했던 것 같다. 스탠드에 돌아오자, 아이들은 12초 정도가 신계, 내 기록은 인간계 상급이라며 나를 다시금 봤다고 하였다. 다음 날, 체육부장은 나를 달리기가 빠르다는 이유로 우리반 축구팀의 왼쪽 수비로 발탁시켰다. 그 후, 고등학교 3학년까지 체육대회 계주는 물론, 구기 종목에 반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체력왕으로 인정받았다.
중학교 3학년 HR 시간이었다.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검트'라는 영화를 봤다. 주인공 포레스트검프는 지능이 약간은 떨어지고, 불편한 다리는 철심을 박아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또래들의 괴롭힘을 피해 급하게 뛰게 된다. 순간, 철심이 다리에서 튕겨져 나가게 되고, 누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내이야기가 영화로 각색되었나 싶었다. 우연으로 자신의 재능을 찾은 포레스트검프처럼,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왔지만 달리기 기록이 갑작스럽게 좋아졌는지는 지금도 궁금하다. 아울러, 요즘 들어 매사에 재미없어 하고, 겁먹고, 일단 피해보자는 나에게 내면의 포레스트최프는 말한다. 일단 달리면 곧 결승점이 보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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