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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131224

  열무 십단 머리이고 시장 간 엄마를 기다린 기형도의 기분이 이랬을까. 아침부터 해가 진 지금까지,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는 이불에 상납한 체로 휴대폰만 간절히 쳐다 봤다. 휴대폰을 보다 노리끼리한 천장 벽지를 보고, 다시 휴대폰 보다 또다시 천장 곰팡이를 쳐다 보며 채용 합격 문자만 기다렸다. 기자로서 어떻게 이 사회의 촛불이 되어야 할까 고민에 지쳤을 무렵, 혹시나 싶어 언론인 준비 카페에 들어갔다. 면접 본 지역방송국 이름을 검색한 순간, 이미 합격자 발표가 끝났다는 글을 보았다.  맨 마지막 수험번호가 나였고 글쓴이는 내 바로 앞이었다. 하루를 꼬박 참은 허기 대신, 배신감에 쌍욕이 튀어 나왔다.  

 

  텔레비전에서 이 지역방송국 번호는 평생 삭제를 하고 살리라 맹세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이 면접관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묻길래 기자 정신이 있다고 했다. 시청 앞에서 청년고용촉진법 폐지를 외치며, 꿀릴 것이 없어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사명감이 기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냐 했을 때, "그렇지!"라며 취임새를 격하게 넣어줬다. 바로, 취업설명회 때 지원서 좀 쓰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자신도 우리 대학 출신이라 했던 사람이었다. 지역 대학 출신에게는 응당 지역방송국의 책무로서 가점도 많이 주겠다 했었고, 최종 면접에도 떡하니 면접관으로 있으니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다. 이번에도 순진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출신은 중요하지 않다, 지역은 중요하지 않다, 글로벌 시대에 어학보다는 마인드다 등 숱한 감언이설에 속았으면서 또 속았다.

 

  내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여름날을 꿈꾸는 하루살이의 헛됨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흘려 들었던 취준생의 자살 토막 뉴스처럼, 이렇게 죽게 되면 누가 알 수는 있을까 궁금해졌다. 집주인일까. 아니었다. 월세는 조교 선배가 따박따박 내주고 있었다. 그럼 부모님일까. 그럴 리 없었다. 엄마는 자식의 불효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제삿날 일주일 전에만 연락을 하였다. 그저 아들이 몇 달 동안 무소식이어도, 곧 희소식이 올 것이라 믿고 계셨다. 고향 친구들은 가망이 아예 없었다. 하나 같이 취업해서 돈 쓰기에도 바빠보였다.

 

  결론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C 선배였다. 우린 졸업생, 취준생, 인구론(인문대 90%는 논다)의 일부라는 전우애를 토대로 매일 대학 도서관에 만났다. 1년을 넘게 준비한 공공기관의 최종 면접에 떨어졌을 때, 한 달 정도는 혼자여도 괜찮으니 마음 추스리고 다시 도서관에서 보자고 했었다. 이제 3주가 남았다. 이렇게 죽는다면, 도서관에서 나를 찾지 못해 결국은 그 형이 자취집에 찾아 올 것 같았다. 웃으며 슬펐다. 시덥잖은 망상으로 치부했을 일에 안도감까지 느끼는 이 상황이 섬뜩하여 이불 속을 벌떡 나왔다. 웃풍에 방 기온은 가라 앉아 있었지만, 일단은 손바닥으로 볼살을 격하게 문대고 모자를 눌러 쓰고 추레한 청바지를 치켜 올렸다.

 

  평소 오가던 후평 2동 주민센터부터 대학 1길까지의 거리가 그날따라 나를 더 신산하게 만들었다. 사방이 아기 예수의 생일날을 고대하는 소음으로 한껏 들떴고, 형형색색 장식등은 어둠에게 반 평 조차 내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세상 모든 이들이 이유 없이 행복해 보이는데, 낙오된 나만 배꼽 아래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달래며 행선지를 찾고 있었다. 결국, 눈에 밟힌 버스 정류장에서 춘천터미널로 간다는 300번 버스를 기다렸다. 어디로 가든 이 외로움이 둘러친 울타리 밖을 벗어날 수는 없는 걸 알았지만 말이다. 그날은, 131224_크리스마스 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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