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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없다고요, 김태희

없다고요, 김태희

 

  내가 너라면 가겠다고 했다. 혹시 이 형이 해외 봉사를 읍네 경로당 위문 방문으로 착각하나 싶었다방금 끝난 한국어교원양성과정에서, 산림대학의 교직원이란 분이 코이카를 가기 위해서라 이 수업을 신청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J형과 대학 후문으로 함께 가며, 코이카가 유명한 산림대학원이냐고 물었는데, 우리나라의 공식 해외봉사단 이름이었다. 난 머쓱함을 피하고자 취업을 곧 해야 하니 해외 봉사는 언강생심이라 흘려 말했다. 그러자 형은 내 두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젊으니까 안 될 것은 없다고 힘주어 답했다. 지금껏 남들에게 모범생으로 살았으니, 이제는 너를 위한 반항아 삶도 필요하다고 보탰다. 그 때 또 다시 J형 말에 혹했다. 나는 자취방에 돌아온 즉시 인터넷으로 한국국제협력단을 알아 봤고, 6개월이 지난 20102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으로 2년 동안 해외봉사활동을 떠났다.

 

  J형은 같은 과 선배다. 내가 형에게 닭백숙을 건네며 우리 만남이 시작된다. 2007년 해남에서의 학과 답사 당시, 민박집 제일 윗목 밥상에 기라성 같은 고학번들과 함께 있는 J형을 봤다. 때마침 나를 아는 선배 한 명이 J형을 소개시켜줬다. 형은 나도 복학한 고학번인데 고생을 한다며 고맙다 인사했다.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신뢰를 더했다. 짧은 머리에 헤어 왁스로 앞머리와 정수리 부분에 포인트를 잘 잡았고, 둥구스러운 하얀 얼굴에 굵은 붉은색 뿔테 안경, 야무진 입술은 모범생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구제틱한 스타일과 남자들은 하지 않은 가죽 팔찌까지, 지금껏 내 주변에는 없는 인물이었다그 후,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심지어 우리는 서울의 지하철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 함께 살기도 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형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딱히 J형을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 풍차만 보면 돌격하였던 돈키호테처럼, J형은 미래의 두려움보다는 현재를 부딪쳐 나가는 사람이었다. 사과의 빨강 부분은 나중을 위해 아껴 먹는 나에게, 저런 삶도 있다는 신선함과 용기를 주었다. 국정원 집 아들에게 영문과라 속이고 과외를 하고(학부 이름에 영어가 들어간다는 논리), 학부 점수가 투수 김병헌의 방어률과 비슷했지만 결국엔 대학원을 선택했다(이제야 갈 길을 찾았다는 논리). 삶이 팍팍하자 지도교수에게 공부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는, 나에게 제자로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자책했다.(어찌되었든 살아야 한다는 논리). 한국어교원양성과정에 수강에 고민하자, 3개월 치 월세 값 아껴서 뭐 할 거냐며 야단쳤던 사람도 J형이었다. 이렇듯,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싶을 때면 J형이 가장 먼저 용의자로 떠오른다. 중국 북경 나비의 날개짓이 미국 뉴욕에 태풍을 불러온다 하듯이, 항상 인생의 주요 변곡점에서 그의 한마디가 내 인생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우즈벡에서 돌아와 취업을 못해 갑갑해 하던 어느 날이었다. 술 기운에 힘을 빌어 J형에게 물었다. 이렇게 살아온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대뜸 우즈벡에 밭가는 김태희는 봤냐고 물어왔다. '없다고요, 김태희'라 했더니 그러지 말고 다음에 사진 좀 보여 달라며 자리를 파했던 거 같다. 대한민국에서 이 답을 해 줄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건 무한 책임이다.'라는 글귀를 시집에서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책임을 다했을까 생각해본다. 그간의 시간을 톺아 보건데, 우리는 '선택은 내가 한 것이니 그 책임 또한 담담하게 어깨에 이고 나가라' 고 말없이 바라봐 줬던 것 같다. "J, Katta rahmat(카따 라흐맛 -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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