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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직장인의 탄생

 지하철 속 직장인의 탄생

 

 이곳은 바로 테르모필레 협곡, 난 영화 '300'에 나오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디다스'가 된다. 나와 내 옆의 이름모를 몇몇은(이 전쟁 통에 휴대폰만 보고 있다!), 스크린 도어 넘어 2열 종대로 사열해 있는 '페르시아 병사들'에 맞서야 한다. 그렇다. 이 지하철 입구를 사수해야 한다.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난 커다란 방패 대신 내 가방을 가슴 앞에 들어올린다. 지하철 문이 열리기 무섭게 이곳만 노리고 있던 이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온다. 그들 표정 모두가 짜증이 한껏 베인 얼굴이다. 바야흐로 중과부적이요 조족지혈이었다. 그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발 뒤꿈치에 힘을 싣어 보지만 이미 내 몸은 지하철의 반대 문앞에 와 있다. 

 

 약 5분전 상황은 이와 정반대였다. 일단 줄을 잘 서야한다. 첫째, 백팩을 맨 사람 뒤는 사양한다. 둘째, 왠지 힘있게 지하철 안으로 뚫고 들어갈만한 사람 뒤에 선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이미 빽빽히 차있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너희들 자리는 없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듯 하다. 무시한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주의하라는 방송도 무시한다. 필사적으로 도하를 시도한다. 생각보다 간단하다. 중력에 몸을 맡기듯, 뒷사람에게 몸을 맡기고 앞사람을 조심히 밀어주면 된다. 어쨌든 탑승 완료다. 그런데 생각보다 지하철 안 밀도가 높다. 이건 너무 좁다고 짜증이 나 뒤를 돌아보니 어떤 사람이 몸을 우겨 넣고 있다. 문 위쪽 부분에 손을 대어서 지지력을 얻어서 점점 들어온다. 지하철 안, 마치 파일 압축 프로그램 '알집'의 압축률이 저 탐욕스런 인간 때문에 120%로 치닫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 보고나, 듣거나, 읽거나, 참 대단하다. 나만 안절부절이다. 오른쪽 가방 끈은 허리가에 있고 이어폰의 한 쪽은 귀에서 분리된 상태다. 바로 앞 여자는 머리를 말리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살짝 닿아도, 그 이질적인 느낌을 견디히 힘들다. 손바닥은 쭉 펴서 재봉선에 갖다 댄다. 혹시나 모를 접촉 때문에 의심받기 싫어서다. 연실 문이 열렸다 다시 열린다. 지하철을 타며 처음 기관사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듣는다. 제발 출입문 주변의 승객은 가방이 문에 닿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출발하면 중간에 또 선다. 앞선 차와 간격 유지를 위해서란다. 가뜩이나 몸도 옴짝달싹 못 한데 지하철마저 정지 상태니 화가 두 배로 난다.

 

  몸에 열이 오르고 셔츠가 땀에 젖기 시작할 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다. 내릴 입구는 지하철 탔을 때의 반대편이다. 그 사이를 휴대폰만 보는 페르시아 병사들이 막고 있다. 이어폰 줄을 부여잡고 연실 '내리겠습니다.'를 반복하며 전진한다. 착한 사람 몇몇은 알아서 잠시 내린다. 몸을 이리 틀고 저리 틀어 결국 지하철 밖으로 탈출을 하였다. 아니, 지하철이 나를 내뱉었다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이미 하루의 힘을 지하철 밖으로 나오는 데 절반 이상 쓴 것 같다. 순간, 내가 지하철을 뚫고 나온 과정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을 나온 것과 흡사하지 않을까 싶다.지하철을 통한 직장인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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