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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나의 결핍

 나의 결핍

 

 결핍은 이중적인 언어라 하였다. 둘 중 하나를 가져온다. 하나는 포기를 부르거나 또는 새로운 개척을 낳는다. 팔자가 이렇지 싶어 무기력해지면 앉아서 굶어 죽을 것이라 하였고, 주어진 운명이 이럴 리 없다 싶으면 일어나 살 길을 궁리를 한다 하였다.

 

 난 물질적인 결핍과 정신적인 결핍을 항상 갖고 살았다. 20대는 그 남아 물질적인 결핍은 있으되, 정신적인 결핍은 참을 만한 시절로 기억한다. 남들은 절대 살 수 없을 것 같다던 좁디 좁은 방 안에서, 꿈만은 100평짜리 집에 사는 내일을 설계하였다. 가난한 시절을 자꾸 미화하면 안 되는데, 어찌되었건 가난했지만 떳떳하였다. 현재는 물질적인 결핍은 조금은 나아졌지만 정신적인 결핍은 심해지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결핍과 열등감을 구분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이 쓴 매끈한 검토보고서에 질투가 난다. 보고서를 쓰는 능력에 대한 결핍인가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한 열등감인가. 뛰어난 어학 실력을 자랑하는 영어 모임의 사람들에게, 난 결핍 보다는 열등의식이 더 끓는다. '그래, 너희들은 외국 유학의 경험이라도 있지'라거나 '분명 어렷을 때부터 비싼 고액 과외를 받았을거야'라며 혼자 씩씩거린다. 열등감은 결핍이 아니다. 결국 감정만 상하게 될 뿐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결핍, 살 길을 찾아 궁리를 하게하는 것들을 곰곰이 나열한다. 글쓰기 수준, 어학실력, 컴퓨터실력, 회사 생활을 위한 문제해결 능력 등등이 순서도 없이 튀어 나온다. 아니다. 이런 것들은 결핍의 껍데기이다. 다시 결핍의 본질을 위해 생각에 빠진다. 어렴풋이 '그거'다 싶지만 꼭 찍어내기가 어렵다. 시간은 있으니 내 운명이 이럴 리 없다고 만들게 된 것들부터 다시 적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살 길의 궁리 끝에 내 이럴 리 없는 운명마저 바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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