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젊은이, 아직은 더 할 때지

 젊은이, 아직은 더 할 때지

 

 

 중학교를 마치고, 낡은 나무문을 열어 몇 발자국 걷고 나면 안방에 도달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아버지가 나를 맞아 주었다. 어두운 방에서 홀로 바둑 프로그램만 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기력해 보였던 아버지를 위로 했던 것은 담배 몇 개피 뿐이었다. 학교에 갔다 왔다는 말과 함께 교복을 벗을라 치면 아버지는 보일러를 돌려 본격적으로 나갈 준비를 하셨다. 그러다 매번 새벽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버지의 일과였다. 그렇게 7년 가까이, 아버지의 말대로 돈 한 푼 벌어오신 적이 없다. 중학교부터 가난은 우리 가족의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새겨졌다. 

 

 시간이 지날 수록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유년시절, 아버지는 양계장집 책임자로서 순박하시고 성실했던 사람이었다. 그 모습에 외할아버지도 좋게 보셨었다고 하셨다. 그러다 IMF때 양계장을 처분하고 실업자가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당시 사업을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회의가 너무 크게 왔다고 하셨다. 응당 받아야 할 돈을 떼인 게 상상을 초월하였다. 사람에 대한 실망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난 그 말조차 너무 싫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얼마나 힘들었는가.(지금도 납득이 잘 안 된다.)

 

 또한, 아버지는 감이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어깨 넘어 바둑을 배우셨고, 대학시절 드디어 아버지는 새로운 직업으로 기원을 열으셨다. 또한 어떻게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도박도 하셨었다고 하셨다. 친구 집에 설날 인사를 갔었는데, 내 소개를 듣더니 아버지를 안다고 하며 전설적인 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쩐지 친척들과 고스톱을 치면 모든 돈은 아버지에게 가는 이유가 있었다. 

그 감은 장사의 촉까지 이어졌다. 기원을 접고 이번에는 동업으로 닭발집을 열었다. 라면도 못 끓이던 아버지가 음식점 사장이 되었다. 닭발집은 친구들이 객관적으로 평가해줘도 맛있었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그러나 동업의 스트레스로 그것도 접으셨다. 지금은 인력을 다니신다. 새벽에 나가 도라지를 케시고 저녁에 돌아오기 무섭게 주무신다. 온 가족은 아버지가 안쓰럽지만 그동안 쉰 게 있으니 한창 때라 말한다.

 

 그런 아버지가 참 많이 약해졌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으니 군대 가기 바로 며칠 전이었다. 아버지가 컴퓨터를 확인해 달랬고 술김에 내 말을 오인하여 화가 나셨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하시며 때리셨다. 순간 놀랐던 것이 아버지가 때린 뺨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뒤, 논산훈련소에 환송을 하던 아버지는 내 입소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보이셨다. 각종 모임때마다 아들을 때려 군대에 보냈었다고 우셨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버지도 많이 어려지셨다. 시간이 흘러 여려지신 게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가 여린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삶이 약간은 이해가기 시작되었다.

 

 동생은 아버지를 '젊은이'라 불렀다. 다 큰 동생이 아버지가 쉬는 날이면 '젊은이, 지금 쉬면 돈을 못 벌잖는가. 한창 일해야지 않겠나.'라 장난스럽게 말할 때가 있다. 아버지는 그 말이 좋으신지 슬쩍 웃으셨다. 가끔 내 힘든 모습에 '젊은이, 한창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힘내시게'라며 그 젊은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하셨다. 도라지를 채며 까맣게 탄 얼굴, 이제는 흰머리카락이 더 많이 보이는 스포츠 스타일의 머리카락을 보며 아버지도 많이 늙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아직은 아버지가 젊은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에게 미안했던 시절을 지금부터 남아 보상하고 싶으시겠지. 내일 날씨도 화창했으면 좋겠다. 젊은이가 아직은 더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