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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달려라, 할매

 달려라, 할매

 

 

 대학교에 입학 날 무렵, 할머니는 우리집을 찾아온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척형에게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가 다니는 그 대학에 우리 장호도 가게 되었데. 그러니 너가 잘 봐줘야 한다. 응? 알았지?' 웃으며 그러겠다는 친척형의 대답에 만족하시며 한 마디 더 보태셨다. '근데 넌 몇학년 몇반이니?' 일순 식구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는 늘 그러셨다. 손주들 사랑이 극진하였고, 아이 같이 순수하셨다. 그런데 할머니와 같이 산 긴 시간들 속에서 그것을 이해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야속하다.

 

 어렷을 적, 유독 할머니가 제일 싫었다. 잔소리만 하셨기 때문이다. 밝은 데 불은 왜 켜놨냐, 그렇게 엄마를 찾아서 뭐하냐, 동생하고 싸우지 마라, 애 어멈은 왜 애들 옷을 새로 사 주었냐 등 매번 내가 듣기 싫은 말씀만 하셨다. 거기에 할머니는 다리를 많이 불편해하셨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매번 답답함을 느꼈었다. 특히 할머니가 해주는 밥은 정말 먹기가 싫었다. 특별히 맛도 없었고, 음식을 하다가 실수로 태우시면 화를 내셨다. 자식들, 손주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욕을 하시다가 자신이 빨리 죽기를 바란다며 우셨다.

 

 그런 할머니가 자식들과 손주들을 지극 정성으로 사랑해 왔다는 걸 점차 알게 되었다. 한번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늦게까지 오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찾아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머니는 성화셨다.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다 큰 성인이 집까지 못 찾아오겠냐며 달관을 하였다. 오직 할머니만 아버지가 돌아올때까지 잠을 자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일을 하게 된 후부터 식사는 할머니가 담당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손주들에게 밥을 해야 하는 것이 할머니의 지상과제가 되었다. 어디 나갈 때도, 어디 나갔다 오셨을 때도 항상 손주들 밥 걱정만 하셨다. 나와 동생은 할머니의 밥이 참 싫었다. 할머니도 자신의 음식에 항상 미안해하셨다. (이젠 그 밥을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의 다리가 많이 아프게 된 것이 모두 집안일을 많이 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집을 오시자마다 치매의 시아버지를 모셔야했단다. 당연히 4남매를 길러야했기 때문에 농사일을 참 많이 다니셨다고 한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비디오였다. 폼생폼사셨던 할아버지에게 집안 문제, 자식들 학비 등은 번외의 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 짐을 모두 할머니가 짊어 지셨다. 집안을 위해 할머니도 어머니의 이름으로 희생을 하셨던 것이다. 그 희생이 큰고모, 우리 아버지, 작은 고모, 작은 아버지에게 퍼졌고, 그들이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 슬하에 2명씩의 다른 세대를 향해 뻗어나가게 된 것이었다.

 

 지금 할머니는 이 글을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실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옆에서 읽어주신다고 하신들 치매가 깊어 기억하시지도 못하실 것이다. 난 할머니에게 당부드리고 싶다. 혹여 지금에라도 그 짐을 다 내려 놓으시라고. 자식들, 손주들이 모두 건성하여 할머니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밥을 차려주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지낸다고 말이다. 그리고 한 번 상상해본다. 그 짐을 다 내려놓으신 할머니가 지팡이를 없이 동네를 걸어가시는 모습을 말이다. 걷다가 모든 것이 가벼워진 것을 아신 뒤 한 번 뛰어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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