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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오늘도 나무에게 미안합니다

 오늘도 나무에게 미안합니다.

 

 주무부처 전화다. 받기 싫다. 뭔가 말을 돌리며 일을 시킬 것이다. 그러나 안 받을 수 없다. 상사 아닌 상사는(그는 공무원이니까) '베트남의 한국어 수요에 따른 전략적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한 기초자료'를 요청한다. 시간은 충분하다. 오늘 저녁 퇴근전까지다. (내 퇴근 시간은 미정이나 공무원 기준이니 오후 6시겠지)

 

 그동안 써 놓았던 몇몇 보고서를 일단 모은다. 대충의 얼개를 그린 다음 세부적인 데이터는 현지 담당자들에게 전화를 돌려 신뢰도와 퀄리티를 높여간다. 마지막으로 주요 산학단체와 공공 연구기관의 연간 및 월간 보고서 자료를 적절히 섞어 주고 간단한 향후 전망을 곁들인다.  과장님의 간략한 피드백을 거쳐 부장님께 보고한다. 진행하라는 말과 함께 메일로 주부무처 서기관에게 파일을 보낸다. 전화를 직접 걸어 메일을 송부했음을 보고 한다.....어디까지나 상상 속의 상황이다. 그러나 상상만으로 행복하다. 실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1차 프린트를 하고 과장님께 보고하면 여러가지 피드백이 쏟아진다. 이 문장의 뜻은 뭐냐, 이 단어를 꼭 써야했냐, 도표 처리가 어떻겠냐 등등을 듣고 바로 수정을 한 다음 2차 프린트 후 보고를 한다. 이번에는 전체적인 정렬이 걸린다고 하신다. 차라리 전체 얼개를 개요-검토방향-검토결과-향후조치(안)으로 하라고 하신다. 책상에 점점 내가 썼던 보고서들이 쌓여간다. 이미 유통기간은 한참이나 지난 음식들과 같다. 버려질 일들만 남은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고치고 3차 프린트 후 보고를 하려한다. 순간 날짜 형식에 마침표가 안 찍힌 게 보인다. 원래 16년 2월 2월이라면 16.02.02.라 해야 하는데 마지막 02 뒤에 마침표를 붙이지 않았다. 다시 4차 프린트 후 보고를 한다. 다행히 통과다. 이제 부장님께만 보고를 하면 된다. 보고서를 보여드리니 이 논거 뒤에는 관련 경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수정 후 다시 프린트를 한다. 무한루프가 끝나길 바라며, 아울러 내 책상에 쌓여가는 이면지를 보면서 말이다. 제법 이면지가 많이 쌓여 시간을 잠시 내 파쇄기에 넣는다. 검은 색 잉크 문신을 한 종이몸이 바스러져 사라진다.

 

 행정이란 무엇인가 가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곤 한다. 결론은 문서를 생산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빛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문서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 프린트를 하며 종이를 소비하고 있다. 마치 전구 불빛을 태양으로 보며 하루 종일 알을 낳는 양계장의 닭들과 비슷한 거 같다. 문서를 쏟아내고, 그걸 종이로 확인하고, 없애버리는 일이 내 직업이 되었다. 그러면서 종이를 소비하는 일이 물을 소비하는 것처럼 무감각해졌다.

 

 돌아오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오늘 하루 몇 장의 보고서를 썼으며 그에 따른 몇 장의 종이를 소비했을까 생각해봤다. 게중에는 분명 토시 하나 잘못 틀려, 또는 오타 하나로 애쓴 보고서를 이면지로 둔갑시킨 일들이 껴있었다. 반성해야 할 일이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둘러주지는 못할 망정 종이를 얻기 위한 도끼질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도 나무에게 미안합니다'라는 생각이 하강하는 에스컬레이터 함께 심연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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