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에게 안식을
횟수를 헤아리니 나도 놀랐다. 12년 동안 다 쓰지 못한 수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고도 부끄러웠다. 실상 다 적지도 못했다. 아직도 가끔 무언가를 적고 있다.
가장 첫장에는 대학교 학과의 이름과 내 이름, 그리고 '책 노트'라 적혀 있었다. 책을 읽고 간단한 독후감을 수첩에 적기로 했던 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시장과 전장'.'김 약국의 딸들' 등의 독후감 몇 편이 적혀있다. 2014년 7월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독후감 쓰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몇 장 넘기니 시간은 2007년과 2008년으로 넘어 갔다. 2008년은 휴학을 하던 시기여서인지 이 때는 주로 하루 일과를 적고, 다 한 것에는 펜으로 그어서 달성 결과를 표시했다. 애초에 목표했던 독서 노트의 역할은 용도 변경이 된 셈이었다.
2008년 이후의 기록은 2012년의 해외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어진다. 취업활동을 하면서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중간까지 썼다. 입사한 첫 날의 준비물로서 이 수첩을 챙겼다. 왠지 직장에서 상사의 말을 잘 받아적어야 일을 잘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신입의 기합이 잔뜩 들어 갔던 1달여가 지난 뒤 챙겨 다니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업무용 다이어리를 별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잘 적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 화면에 수첩 메모 기능을 자주 이용한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 수첩을 본 회사 동료가 말하길, 참으로 기고지순한 사람 같다며 놀랐다. 여자 친구에게는 꼭 그럴 것이라고 웃어 넘겼다.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이제 헤어질 대로 헤어진 수첩의 수명이 다했음을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동안 적는 것의 중요성을 잘 몰랐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지금은 빨강색 수첩에 이것저것 잘 적고 있다.) 남은 5장을 어서 채운 뒤 명예롭게 안식을 줄 것이다. 가끔 삶의 기억을 더듬을 때 내 너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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