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세기의 명작 '그리스인 조르바'는 뭇 사람들에게 '자유'의 의미에 대한 고민과 의미를 던져준 책이다. 주인공 조르바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개나 줘버리라며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서의 표상을 보여준다. 주인공 또한 조르바의 모습에 영향을 받아, 그가 준비한 사업의 실패 순간에 신나게 춤을 추게 된다. 작품은 곧 작가의 사상이 녹아 있음을 잘 보여주는데,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또한 범상치 않다. 그는 묘비명으로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고 적었다. 뭔가 멋있는 말임에 얄립도록 분명하지만 따지듯이 묻고 싶다. 정말 자유라고?
누구나 자유를 꿈꾸고 갈망한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기준은 간단하지 않다. 대학 강사인 선배는 학생들에게 자유의 의미를 물어봤었다고 한다. 학생 한 명이 겨우 '아무렇게나 하는 거요'라 답했다고 한다. 선배가 '그러면 제가 칼로 아무나 찔러도 될까요?' 라 반문을 하니 학생들이 일제히 웃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절대 권력으로서 사회의 법과 규율에서 벗어난 상태로 답한다. (이는 대개 돈이 많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왠지 사모님에게 잡혀 사는 것임이 분명한 회사 과장님은 아내로부터의 감시에 벗어난 상태를 말씀하신다. 하기사 출장 시에 2시간 단위로 아내에게 카톡 보고를 해야 한다하니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축구 감독 무리뉴처럼 '스페셜 원'이 아닌 '노멀 원'인 내가 자유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자유에는 분명 용기와 고통이 따른 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유는 선택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중부지방이 비옥한 내 모습에 다이어트와 운동을 통한 체형 변화를 선택했다고 치자. 일단 야근 시 저녁식사부터 걸러야 한다. 저녁을 함께 했던 회사 동료들과 저녁식사를 거절할 용기와 의심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역기를 들고 유산소 운동의 심심함과 무료함을 이겨내야 한다. 이를 통해 날씬한 내 모습, 이상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여 결국 그것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내 의지를 갖고서 말이다.
묘비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다음과 같은 자유를 갈망하기로 했다. Free from(~로 부터의 자유)의 자유가 아닌 Free to(~를 향한 자유)의 자유를 위해 움직이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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