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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매블10] 아, 나도 산타였어

 언제부터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지 않았을까. 어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회사 동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애기들이 산타를 아직 믿고 있냐는 것,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줘야 하는데 그럼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지 물었다. 호기심에 그냥 질문을 했는데, 의외로 대답은 다 똑같았다. 아직 나이들이 어리니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아울러, 산타 역할을 굳이 할 것도 없이 미리 유치원에 선물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면 유치원에서 산타할아버지에게 용역(?)을 줘서 대신 전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 그말을 듣는 순간 2012년이 떠올랐다. 나도 한 때는 산타였던 시절을 말이다.

 

 취업도 안 되어 청년 백수로 크리스마스 이브를 피해가려 고민하던 때였다. 당시 고향의 영어 유치원에 선생 알바를 하는 친구 하나가 산타알바를 부탁했다. 갑작스러웠다. 영어유치원의 산타 알바라니. 뭘 해야 하는지 내용도 없었고, 돈도 얼마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1시간도 체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그 친구도 옆에도 지켜봐주겠다고 해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수락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시간 맞춰서 그 영어 유치원에 가보니 제법 규모가 컸다. 친구가 연락을 받고서 원장 선생님과 함께 맞았다. 창고로 조용히 가서 준비된 산타 복장을 입었다. 당연히 입에 수염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임무는 간단했다. 애들 이름을 호명해서, 부모들이 써 준 내용을 대독하고 선물을 주면 끝이었다.

 

 안내에 따라 아이들 교실로 들어가니, 이미 모든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옹이종기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들 시선이 소위 산타로 보이는 나에게 집중되었다. 높지 않은 연단의 가운데에 서서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산타할아버지라 인사를 했다. 목소리를 성대모사해야 했나 고민도 잠시 하였지만 그냥 그러지 않았다. 아뿔사. 생각외로 반응이 싸해서 놀랐다. 그리고 들려오는 어떤 남자 아이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얼렸다.

 "에이, 산타 할아버지 아닌 거 다 알아요!"라 말이다.

 머리는 텅 비었고, 이에 대응 방안은 생각나지 않았다. 고작 5살 남짓의 애들한테 이리 당할 줄이야. 친구 또한 저 뒤에서 웃기만 하고 있었다. 순간, 원장 선생님이 이런 것을 예상이나 하셨듯이 애들한테 말했다. 

 "여러분,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이러지 않기로 했었단다. 애들도 바로 "네!"하고 대답하는 것에서 난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애들은 너무 순진하게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이미 다 이러지 않기로 한 자리였고, 그냥 난 산타 아바타나 성실히 수행하면 되었다. 가져온 빨간 보자기에서 선물을 하나씩 꺼내 이름을 호명하고, 그 아이에게 부모님들이 적어준 편지를 읽은 뒤 선물을 수여했다. 처음의 소란은 좀 있었지만, 의외로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증정식은 좋은 분위기에서 잘 끝났다. 산타로 변신은 그렇게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영어 유치원이라 그런지 알바비로 많이 줬던 것 같다. 친구가 끝나기를 기다려 프렌차이즈 떡볶이 집에서 점심을 쐈다. 애들이 너무 좋아했다고 하니, 기분이 좋아 튀김,순대를 추가로 시켜줬다.

 

 언제부터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지 않았을까. 다른 애들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인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살던 지금의 고향집은 일단 굴뚝이 없었다. 그러니 산타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올 수 없었다. 또한, 이미 올해 몇 번 울었다. 선물 기프티콘을 날린 거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다 아빠가 저녁 늦게 선물을 숨겨 놓는 거라 믿었다. 이브날은 되도록 안 자기 위해서 별의별 노력은 다 했지만 결국은 아빠가 오기 전에 잠들었고, 혹시나 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선물이 놓여있긴 하였다. 그러면 어머니가 그랬다. 산타가 아닌 아빠에게 빨리 고맙다고 하라고.

이제 산타를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지만, 일년에 한 번이라도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로서 감사를 표하는 이 연말이 좋다. 2021,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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