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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라미란 아줌마와 우리 엄마의 알파벳

  라미란 아줌마와 우리 엄마의 알파벳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라미란 아줌마와 우리 엄마*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알파벳을 모른다는 것이다.

 

 세간에 떠들썩한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드라마 한 편이 끝나기 무섭게(혹은 드라마는 상영 중인데) 포털사이트에 중요 스토리가 게재된다. 몇몇 글만 읽어도 대충의 줄거리를 알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낄 수 있다. '응답하라 1988'이 한창 유행일 때도 그랬다. 그날 퇴근 길 휴대폰으로 본 기사는 '라미란 여사, 알파벳이 뭐길래.'였다. 한 가족의 엄마로 나오는 라미란 아줌마가, 아들의 요청에 여권의 영문 번호를 말해야 했다. 회피를 하다가 '실은 엄마가 영어를 몰라'하며 멋적게 웃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읽으니 중학교 1학년 때 엄마가 처음이자 마지막 이력서를 썼던 날이 펼쳐졌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오래된 나무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동생이 종이 하나를 갖고 달려 나왔다. 이것 보란다. 대충 보니 엄마의 이력서였다.  당황한 내 표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초등학교 동생은 자신이 대신 써줬다는 학력칸을 가리키며 웃었다.

 "이것 봐, 이 부분에 초등학교 입학, 그 다음 줄은 초등학교 졸업 밖에 쓸 게 없어."

 동생은 또 생길 수 있으니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한 고민도 잠시, 나를 보는 엄마는 부끄러운듯 웃을 뿐이었다. 엄마를 채근했다. 내일부터 전자제품 상점에 일을 하기로 했는데 이력서를 가져오라고 하였단다. 첫 출근이란다. 이제는 엄마라도 나가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생략된 거 같았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엄마가 1시간 전부터 ABC를 공책에 쓰고 있었다던 사실이었다. 왜 알파벳을 외우고 있냐고 대뜸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차가운 질문이었다. 지금껏 알파벳을 몰랐던 것이었는지, 그게 지금 왜 필요한지 2가지의 물음이 동시에 던져진 것이었으니. 전자 제품 번호를 알아야 손님 응대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차싶었다. 그 동안 엄마는 알파벳을 몰랐던 것이었다. 알파벳을 알 수도 없는 삶을 하신 분인데 어쩌면 당연했다. 그걸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이야. 차라리 나도 동생처럼 유쾌하게 넘어갈 걸 그랬다. 그 날 엄마는 밤 늦게까지 알파벳을 외웠다. 나는 그 옆에서 핀잔을 주며 거들었다. 손목이 시어서 쓰기 힘들다고 하면서도 깎두기 공책의 절반 이상은 썼던 것 같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줄곧 엄마 생각이었다. 손님들이 물어봤을 때 알파벳을 까먹었으면 어떻하나, 설마 주인이 뭐라고 하진 않을까, 무시를 당할 일이 생기는 것 아닌가, 불안한 상상만으로 시간표를 때웠다.

 

 여행을 가게 된 라미란 아줌마는 여권을 펼쳐든다. 아줌마 아들은 여권 영문 이름 아래 한글을 작게 적어 놓았다고 하였다. '엠 아이 알 에이엔 알 에이, MI RAN RA.' 알파벳을 모르는 엄마를 위한 아들의 배려였다. 반면, 난 서류전형을 확인을 위해 회사 사이트에 로그인을 못하는 엄마에게 화를 냈었다. 엄마는 라미란처럼 살짝 웃으며 통화 넘어로 알파벳을 모르니까 미안하다고 하였다. 예전에 배운 것은 다 까먹었다는 말과 함께. 문슥 머슥해져서 알았다며 통화를 끊었다. 내가 너무 바보스러웠다. 봉사활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알파벳을 몰랐지만 아들과 연락을 위해 싸이월드 아이디를 만들어 로그인을 하였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아들과 연락이 잘 안 되니 그참에 싸이월드 아이디를 만든 다음 나에게 글을 남겼다. 봉사단원들 중에서 단연 역대급 엄마였다. 그렇게 지혜가 있는 분이신데 알파벳이 뭐길래 화를 내다니.

 

 그렇게 엄마는 알파벳과 비교할 수 없는, 내 글쓰기 능력으로는 표현조차 못할 지혜와 자식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다. 그 지헤와 사랑이 오롯이 쌓여 지금에 나와 내 동생이 있다. 엄마의 삶은 나를 통해 이어지고, 나를 통해 완성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일상을 대하는 내 태도가 또한 치열하고 진지해져야 겠다고 느껴진다. 오늘, 어버이날을 대신에 당신에게로 가려고 자취방을 곧 나설 것이다. 단순히 지금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다. 엄마에 대한 채취를 느끼고 보듬고 눈을 맞추러 갈 것이다. 지금, 당신을 만지러 갑니다.

 

(원고지 10.8장 / *'엄마'라는 말은 단순히 입술 소리로서 아기들이 가장 하기 쉬운 말로 알고 있다. 아기의 말로 어머니를 말하기는 것에 일부 사람들은 철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어머니'보다는 '엄마'가 정감 있다. 참고로 2014년 '아빠','엄마'는 모두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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