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에게
오늘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하였지. 어제 저녁에 먼저 연락하려 했어. 다만 저녁 일정이 늦어졌지. 예전 같으면 일정 도중에 나와서 너에게 연락을 했겠지. 그러나 너도 알잖아. 이제는 나도 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을. 그래도 오늘 만나자는 약속을 흔쾌히 수락해줘서 고마웠어.
회사일을 마치고 너를 만난 곳은 예전의 그 독서실 앞이었지. 근래에 독서실을 다시 다닌다는 너의 말에 조금 놀랐어. 큰 결심을 한 것이겠지. 마냥 그 열정을 부러워한다는 것 알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건 정말이었어. 대학교 1학년 글쓰기 시간에 넌 내게 무슨 토익책을 보냐고 물었지. 난 정말 성의없이 대답했어. 만약 그 때 토익이란 것에 관심을 갖고 너의 대답을 경청했다면 어땠을까. 그 뒤, 넌 반수를 하고 다른 대학으로 입학을 하였지. 그 후 자그마치 10년이 넘게 네 소식을 아주 간간히 들었어. 행정고시 결과가 좋지 않아서 졸업이 계속 미뤄지고, 결국 전과도 했다고 들었었지. 우즈베키스탄에 갈 때, 비로서 넌 졸업이 아닌 군대에 간다고 했던 것 같아.
가끔 생각을 해. 작년에 너를 다시 만났었던 때를 말야. 출근길 횡단보고를 건너서 버스 정류장으로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가 내게 반갑게 인사를 하였지. 이 서울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니. 누군가 했어. 너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고시촌 입구의 버스 정류장이라니. 출근 버스가 다가와 허겁지겁 너의 명함을 받았지. 그날 오전에 바로 만날 약속을 잡았지. 서로의 집 거리가 5분 거리도 안 된다는 사실에 신기해했지. 그런데, 내가 먼저 너를 보았다면 나는 과연 알은체를 하였을까? 섭섭한 이야기겠지만 아닐 수도 있어.
우리는 초,중,고등학교를 함께 했지만 항상 경쟁자 관계였지. 초등학교야 말할 것도 없고, 중학교도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항상 서로의 성적에 으르렁 거렸었지. 중학교 2학년 이후, 나는 너를 의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너는 나에게 그냥 얄미운 아이로 남았지. 지금도 그러한 감정이 아예 사라지진 않은 것 같아. 지금도 긴 이야기를 하면 너와 나는 참 다른 시각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잖니. 문득 '국정교과서에 어떻게 생각하냐'는 너의 질문을 시작으로 우린 1시간 동안 격하게 토론과 말싸움을 하였지. 서로를 이런 놈이 자신의 친구라는 점에 개탄했지. 그렇지만 솔직히 나의 지적 수준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됐어. 논리로는 밀리더군. 내 자신이 간만에 초라해졌어.
그건 시작이었지.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신문의 종류와 책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졌음을 수시로 확인하지. 10대에 1라운드가 끝났다면, 이제 2라운드가 시작된 것 같다. 그렇게 격한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냐는 한탄으로 마무리되지. 서로의 마지막 입사면접에 합격을 하였다면, 너는 묵묵히 국가에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세계를 주름잡는 글로벌 인재로서 살지 않겠냐고 키득거리지. 곧, 떨어졌는데 그런 상상이 무슨 소용이냐 하고 마무리가 되지. 서로가 어려운 환경을 이겨냈으니 이제는 잘 될 일만 남았다고 기운을 넣지. 그리고 향후 40살에는 이런 후회의 말은 절대 하지 말자고 다짐하지.
저녁 내내 너의 표정이 좋아서 안심이었어. 지난 주 너의 이야기에 나도 많이 놀랐었거든. 서로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 여자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을 때 말야. 남들은 선망하는 직장에 있지만 네 마음에는 차지 않겠찌. 그래서 힘들지만 다시 이직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한 거 같았어. 앞으로 '안주'할꺼냐는 너의 물음에 '안정'이란 단어를 써야 한다고 정정해 주었지. 알아. 너도 나를 많이 안타까워 한다는 것을. 너를 따라 그 독서실에 다녔지만 너만큼의 열정은 없는 거 같아. 진로를 고민해 보라는 너의 충고는 고민 해볼게. 하지만 너도 이제 쉬엄쉬엄하렴. 가장 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지금 너가 걸어온 성취가 결코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란다.
그런 의미로, 내 계약 형태가 바뀐 것도 축하할겸 오늘은 내가 저녁 냈다. 널 가장 가까이서 응원하마. 다만, 너무 잘 되진 말아라. 분명 배 아플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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