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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다림질

 다림질

 

 삶은 리추얼(행사)의 연속이어야 한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거나, 즐겁게 음악을 듣거나, 잠깐의 독서라도 즐기려는 행복한 순간이 있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취생으로서 주말이면 어김없이 빨래를 해야한다. 그리고 건고기에 의해 꼬깃하게 말려진 셔츠들을 다시 펴야 한다. 펴진 셔츠여야 직장에 나갈 수 있고, 밥법이를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다림질을 하는 귀찮은 시간이 점차 나만의 리추얼이 되어가고 있다.

 

 동생은 내가 주말마다 셔츠를 직접 다린다는 것에 놀랐다. 근처 세탁소에 맡기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난 대뜸 그게 돈이 얼마냐 했다. 한 벌에 2천원씩, 보통 일주일에 5벌을 입어야 하니까 근 만원 정도는 소요된다. 한 달이면 약 4만원이고, 난 이것을 아끼려 직접 다린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정성껏 셔츠를 다렸다. 그런데 그 시간이 점차 아까워졌다. 주말 48시간 중 금쪽같은 1시간을 셔츠를 다리는 데 쓰다니. 동생처럼 자본의 힘으로 끝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름 주말 행사로서 받아드리니 이제는 괜찮다.

 

 요즘 들어 하는 생각하나, 다림질은 일종의 명상 효과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기야 뜨개질이 실제 명상 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으니까, 설마가 사람 다리미 잡게 할지도. 이만 각설하고, 다림질을 하면 그냥 편안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등판부터 다린다. 면적이 넓으니까 가장 공들이지 않고 다릴 수 있다.  가끔 일본소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의 남자 주인공을 상상한다. 분명 다리지 않은 셔츠를 입어서 등짝을 발로 차였을 것이라 의심한다. 목 부분, 소위 카라는 여러번 지진다. 날이 서야 회사에서 기가 설것 같다. 이제 셔츠를 돌려서 단추부위를 다린다. 다림질 한 보람이 가장 있는 부분이다. 끝으로 팔을 다린 뒤 한벌 드디어 끝낸다.

 

 요즘 들어 하는 행동하나, 다림질을 하며 커피소년의 '다리미'란 노래를 꼭 튼다. '칙칙해졌어요/ 빛이 바랬네요/원래는 고왔었는데 많이 상했네요.' 그랬지. 이 셔츠를 입었던 것이 언제더라 싶다. 면접을 위해 처음 샀던 셔츠, 벌써 8년이 지났다. 어쩌면 다리는 것보다 안식을 줘야 하는 게 맞는 것도 같다. '얘가 이렇게 구겨진 애가 아닌데/ 삶이란 풍파가 널 구겨지게 했구나/조심히 다려줄게/내가 널 다시 펴줄게' 일주일 회사의 풍파를 함께 견뎌서 꾸겨진 셔츠를 본다. 다시 그걸을 복구하는 것이 마치 나를 치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참 곱고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내가 나를 돌려 놓고 싶어진다. 

 

 다리미 속의 물이 흘러 나와, 다리미의 가장 뜨거운 밑쇠에 닿아 증기를 뿜어낸다. 그 소리와 냄새가 싫지는 않다. 5섯벌의 셔츠를 옷장에 넣는다. 어떤 것은 팔줄에 주름이 있는 것 같아 아쉽지만 그만 넘긴다. 이것들을 입고 다시 삶의 터전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또 주말 행사가 끝난다. 삶은 리추얼의 연속이어야 한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거나, 즐겁게 음악을 듣거나, 잠깐의 독서라도 즐기려는 행복한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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