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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

 스승과 제자의 인연

 

 불교에서는 '겁'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인연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상상해 보자. 하늘에서 100년마다 선녀가 목욕을 위해 폭포로 내려온다. 목욕을 끝낸 뒤,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100리가 되는 커다란 바위에서 잠시 쉰다. 그 순간, 선녀의 옷이 잠깐 바위를 스치는 데,  '살짝' 옷깃이 스치고 스친 시간이 모두 쌓여 바위가 닳고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1겁이라 한다. 이 1겁이 천 번이나 모였을 때 한 나라에 태어나고, 2천겁에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며, 5천겁에 모여야 한 동네에 태어난단다. 부부의 인연은 7천겁이며, 9천겁이 되어야 형제와 자매가 된다. 그리고 이 겁이 비로소 1만겁이 되었을 때가 스승과 제자가 된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부부의 인연보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맺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승의 중요성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삶을 성공짓는 요소 중에 최소 1명의 은사는 있어야 한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독서량이라든지,마신 술의 양에서는 모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좋은 스승을 꼽을 수 있어야한다는 부분에서 자신이 없어졌다. 초,중,고등학교 담임 선생님 성함부터 모두 떠올려 보아도 손꼽을 만한 인연이 없었다. 동창들을 만나더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특히 가장 중요한 시기인 고3때 선생들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학생들은 자율학습을 하는 데 한일 월드컵 경기를 보러 도망을 쳤던 선생, 자신의 수2를 가르칠 줄 모른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던 수학 선생님, 정원 채우기에 모자란 대학으로부터 로비를 받아 유독 그 대학으로 하향 지원을 강요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훌륭한 한국어 선생님은 아니었다. 종합반 선생님으로 일했던 학원에서도, 스승의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시간을 때우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 만약 불교에서 말하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알았더라면, 그 소중한 인연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을까.    

 

 그래도, 다행이다. 첫째, 시선을 돌려보면 또 다른 스승들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나에게 자기희생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계시는 부모님은 삶의 가장 훌륭한 스승님이다.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대학교 선배들은 하나같이 가난했지만, 긍정과 유쾌한 삶을 사는 법을 가르쳐줬다. 나와는 다른 시각으로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게 해 줬다. 둘째, 아직은 좋은 스승을 만날 시간도 무궁하고, 누군가에게 스승의 이름은 아니지만 좋은 조언자가 될 기회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좋은 스승을 만나길 기대하지 말고, 작은 가르침과 방향 제시에 내가 얼마나 받아들이고 감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 스승의 날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스승'이란 것은 '제자'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부부와 형제처럼 피와 살이 아닌 다른 어떤가로 이어져야 하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일방적인 인연이 아니다. 상호 소통의 결과로서 맺어지고, 이어지고, 기억되는 관계다. 그래서 가장 소중하고 어려운 인연이 아니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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