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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30일 글쓰기 - 4] 죽음에 대하여

 

빈 공간과 단절

 

지금 생각해봐도 할아버지의 죽음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누구는 허망하다고 했고, 누구는 살다가 그 성격대로 갔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큰 고모에게 전화를 하는 엄마는 오열을 하였다. 지금 타 지역의 큰 병원에 갔던 할아버지가 돌아오신다며 말이다. 그 때 처음 알았다. 병을 고쳐 집으로 오는 게 아니라, 살 가망이 없어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할아버지는 '죽음'의 상태였다. 어제 저녁까지 몸의 어떤 이상도 없었고 건강하셨는데, 잠들은 상태에서 뇌출혈로 내 곁을 떠나신 것이었다.

 

태어나서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곳은 교도소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쥐어 준 에어캡만 신나게 터뜨리며, 정작 할아버지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거 같다. 할아버지는 출소를 한 날, 빈 버스 한 대를 몰고 와서 손주인 나만 태운 뒤 시내를 돌았다. 그 때부터 할아버지는 멋쟁이면서 무서웠다. 또래 친구분들도 많았는데, '형님'이라 부르며 할아버지를 대장처럼 깎듯이 대했다. 나와 동생은 할아버지의 대문 여는 소리에 잽싸게 뛰쳐 나갔지만, 고모들과 아빠가 어렸을 때는 그 소리만 들려도 허둥지둥 숨기에만 바빴다고 했다. 폼생폼사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던 내 할애비는, 불같은 성격처럼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과속으로 우리와 이별했다. 내가 경험한 첫 죽음이었고, 할머니가 적적하실까봐 할아버지가 눕던 자리에서 내가 자게 되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빈 공간을 채우며 나는 자랐다.

 

반면, 할머니의 죽음은 지리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초연하고 덤덤하게 집에 꼭 내려와야 한다고 하셨다. 순간, 할머니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고향집에는 고모들과 고모부들, 작은 아버지와 친척 조카들, 친척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모두들 할머니께 인사를 시켰지만, 손주가 왔다는 내 말에 할머니는 대답을 하시지 못하셨다. 야윈 몸에 눈을 감고 입을 벌린 할머니는 들릴 듯 말듯 한 숨소리만 내시고 계셨다. 새벽이 다가올때쯤 할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셨고, 우리는 손수건을 적셔서 할머니 입에 올려드리는 것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할머니가 가시는구나.' 란 생각이 들었을 때, 정말 기적처럼 할머니는 눈을 떠 우리를 슬쩍 보신 후 돌아가셨다. 

 

난 할머니가 싫었다.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은 하나 같이 맛이 없었고, 아껴야 잘 산다며 손주들이 새옷을 사는 것을 뭐라 하셨다. 종종 말이 안 되는 이유로 부모님들과 우리에게 호통을 치셨는데, 예전에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는 시집 온 지 얼마 안 된 어머니를 의심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커가면서 차차 깨달은 점은, 할머니는 표현이 투박하실 뿐 누구보다 가족들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돈을 벌어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려 무리한 일들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동네 경로당에서 유일하게 지팡이를 짚었을 정도로 노년에 다리가 너무 안 좋으셨다. 치매와 중풍이 있던 시아버지를 지극히 간병한 며느리였고, 자식과 손주들 걱정에 매일매일 전화기를 돌리셨던 어머니였다. 그래서 할머니의 죽음은,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과의 단절임을 알게 해 주었다. 

 

어떤 이는 하루하루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하라 하였다. 그러면 지금 본인이 가져야할 삶의 태도와 방향이 명확해지고, 좀 더 겸손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전해 준 '죽음'이란 의미를 좀 더 가까이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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