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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한 비디오 테이프

 지금까지 보지 못한 비디오 테이프

 

 

 평생 못 볼 것 같은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 비록 20여년이 지났지만 그 테이프는 지금도 할머니방 텔리비전 서랍 왼쪽 위 부분에 놓여 있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심포지엄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 살면서 처음으로 자만하지 말아야겠다는 부끄러운 다짐을 준 증거물이다. 부끄럽고 아쉽기만 하여 단 한 번도 그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보지 못할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첫 국어시간이었다. 자기 소개를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국어선생님은 국어부장으로 날 찍으셨다. 그리고 얼마 뒤, 국어 선생님은 소설 '소나기'를 주제로 집단 토의 발표회를 가졌다. 국어 선생님이 맡고 있는 1학년 반들 중 우리 반으로 고르 것에는 그만큼 우리 반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사회자는 자연스럽게 내가 맡게 되었는데, 전체 토론을 진행해야 하기 때무에 역할이 자못 막중하였다. 몇 번의 진행 연습을 하였고 토론 발표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도 늘상 생각하는 장면인데, 토론 발표회를 위해 단 한번도 사회자 연습을 해 본 적이 없다. 자만했기 때문이다. 가장 믿지 못할 사람인 나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였다. 국어 선생님은 학교에서도 유명하셨던 분이라 제법 많은 선생님들이 교실 뒤편에 위치하셨다. '소나기'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은 절반도 지나기 전에 사회자 때문에 꼬이기 시작했다. 발표자를 헷갈려 넘어가거나, 친구들의 이름도 생각이 안 나 버벅거렸다. 얼마나 당황을 하였는지 국어선생님은 슬그머니 다가와서 내 손을 살며지 잡아 주셨다. 그렇게 발표회를 내가 망쳤다.

 

 며칠 뒤, 교원 사무실에서 마주친 국어 선생님은 날 보시더니 발표회 사회를 너무 잘 봐서 고맙다고 하셨다. 너무 죄송하여 어떤 말씀도 못 드렸다. 내 표정은 아랑곳 않으시고 선물이라며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주셨다. 발표회를 찍힌 영상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라며 다시 한 번 수고했다고 하셨다. 부끄러움에 집 어딘가 놓고 기억에서 사라질 즘, 할머니와 어머니가 우연히 비디오를 보셨다고 한다. 당시 할머니는 내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셨다고 하셨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아 그리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회사의 일년 중 가장 큰 행사가 진행 중이다. 내일은 프로그램 중 하나의 사회를 맡게 되었다. 작년에도 했던 일이라, '당일날 연습이나 좀 하지'라 생각이 들던 중 잊고 있던 비디오 테이프가 떠올랐다. 그래서 지금 내가 짠 사회자 대본을 다시 보고, 읽어보고 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비디오 테이프를 언젠가 볼 수 있는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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