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에 녹용즙이라니
녹용즙을 며칠전부터 먹고 있다. 갑작스럽게 고모가 보내오신 것이다. '이 나이에 무슨 녹용즙이라니'라는 생각과 동시에 트로트 곡 '내 나이가 어때서' 가사가 떠올랐다. 만약 어머니가 이런 걸 보낸다고 한다면 무조건 결사반대를 했을 것이다. 고모가 보낸 것이라 군말 없이 받았다. 어머니는 안도하신 듯,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아들아, 자기전엔 꼭 먹어야된다. 이것은 엄니 명령이다.' 뚱한 이모티콘 하나를 답변으로 보내드렸다. 이 애물단지를 어쨌거나 먹고는 있다.
보약이 싫은 이유는 플라시보 효과 때문이다. 이걸 먹는다고 절대로 건강해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신부터 이러니 백약이 무효할 것이다. 이런 약에 의존하여 건강해지기 싫다. 물론, 약이 필요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정말 가정을 짊어졌거나, 운동 외에 건강해지기 위한 보완이 필요한 사람에 한해서일 것이다. 아직은 창창한데 보약부터 먹다니 뭔가 쑥스럽기까지 하다. 이럴 바에야 참한 처자 맞선이나 주선해 주는 게 삶에 더 활력소가 될 것 같다.
더군다나 보약을 먹고 난 후부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심만 먹고 나면 잠이 오는 것이다. 원래 회사에서 잠은 저녁을 먹은 후에 찾아왔다. 점심 후 졸고 있으니 많이 민망하다. 사람들이 분명 봤을 터인데 별말은 안 한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은 알고 있다. 사람들이 걱정까지 해주니 더 무안하다. 보약이 몸에 좋은 이유는 잠을 많이 자게 해서가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보약으로 모든 범행을 넘기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근래의 충격적인 경험에 용의자는 보약 밖에 없는 것 같다.
고모의 마음은 물론 어머니께 효도 하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먹고는 있다. 몸이 좋아질지 잠이 더 늘어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하나씩 먹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보는 시간으로 삼고자 한다. 나아가 어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과 친척분들께 보약이라도 지어들어야 할 날이 오도록 해야겠다고 슬쩍 생각해보았다. 그런다고 씁쓸한 녹용즙이 단 맛으로 변하진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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