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게 더 유하게
"선생님, 죄송한데 공부를 그만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대학원 박사 선배는 그렇게 지도교수를 협박(?)했었다. 생활고 때문이었다. 지도교수는 놀라더니 그 이유를 물었고, 조금만 기다리면 곧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나에게, 지도교수에게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했던 것에 죄송하다고 했다.
난 되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선배는 말했다. 참고 참고 참았다가 정 안되는 순간에는 그런 용기가 생긴다고 했다.
인생에 영향을 준 대학원 박사 선배의 말은, 기존 참고 참아 일을 저지르는 내 성격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다. 문제는 참다 참다 못 참았다 하는 행동이 과격적이라는 데 있다. 일례로 근래 회사가 지원하는 학회에서 그냥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회사가 지원하고, 발표자는 우리 부장님이고, 우리는 개인 직무개발 시간이 인정되기 때문에 여러모로 참석이 장려되는 학회였다. 그 폭염에 학회 장소에 찾아갔는데, 글세 사전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 부장님 강연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회사의 담당자를 불렀으나 미안하다고 하였다. 부서 단톡방에 이러한 사정을 알린 뒤 그만 가보겠다고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근처 지하철에 왔을 무렵 후임이 부랴부랴 전화를 하였다. 다른 강연도 있고 교육 시수도 있으니 돌아오시라고. 괜찮다는 말과 가던 길 항했다.
치기어린 20대까지 이런 행동은 뭔가 있어보이기도 하고 당당했었다. 30대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내가 마약 아랫 사람을 챙겨야 하는 과장님 정도였다면 그럴 수도 없었으리란 생각까지 들었다. 어렵고 답답한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의 응어리를 좀 풀고 이야기하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참고 참고 참았다가 확 지르는 순간보다도 참고 생각하고 이야기하여 해결하는 성격으로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갈대의 유연함이 폭풍의 세찬 바람을 견딜 수 있는 비결이 아니겠는가.
'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 > 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회사생활을 옆에서 보니 (0) | 2016.12.30 |
---|---|
서울행 단상 (0) | 2016.08.27 |
내가 보고 싶은 리우 소식 (0) | 2016.08.21 |
스켈링 치료를 받으며 (0) | 2016.08.18 |
손가락에 힘부터 빼고 (0) | 2016.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