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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아버지의 각서

이번 출장에 각서를 받아올까 생각하다가, 불현듯 아버지의 각서가 떠 올랐다.

 

분명 아버지는 안방에서 누군가와 양계장 사업에 관한, 엄연히 말하면 사업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정확하진 않다.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알고자 아버지께 그 때 일을 물어볼 용기도 없다. 용기라기 보다는 굳이 그럴필요가 없다는 말이 맞겠지.

 

늘상 추웠던 안방에서 이상한 남자의 설명을 듣더니 아버지는 담당히 서명을 하였다. 그 순간 안방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소리를 쳤다. 함부로 그런 걸 써 주면 어떻하냐고 호통을 치셨다. 물론 할머니가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너처럼 모르셨을 것이다.

 

할머니의 호통에 항상 할머니는 왜 저러시냐.. 라는 짜증보다는 이 각서가 우리집에 몰고 올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차압당하는 것인가? 빚이 더 늘어나는 것인가? 도대체 뭘까?

 

아버지도 짜증을 냈다. 항상 할머니께 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가만히 좀 계시라고.

 

어쨌든 그 서명 후에 특별히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 때의 각서 분위기는 내 머리 한켠에 오롯이 남았었나 보다. 각서를 상상함과 동시에 그 추운 방과 서류들과 할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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