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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세계시민과 후원자

 세계시민과 후원자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마지막 절차였다. '여자 손을 잡아 봤던게'라며 잠시 당황했지만, 내심 침착히 손을 내밀었다. 이런 순간을 위해 '손 씻고 핸즈크림을 바르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하필 오늘은 저녁 양치 후 깜빡해 아쉬웠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라, 그녀는 황급히 작은 우편 봉투에 이것저것 넣어준다. 한 번 꼭 읽어보라는, 내가 후원하게 될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설명한 작은 브로셔라 하였다.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공손히 건넸다. 오늘, 유엔난민기구(UNCHR)에 정기 후원자가 되었다. 세계난민들의 정착과 보호를 위해 월 2만원씩 후원하기로 하였다.

 

 문득, 30대 목표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대 목표는 '대한민국을 움켜 쥐자'였다. 꿈만 컸다. 항상 이런 식이니 실망도 아쉬움도 없었고 비웃음만 났다. 그래도 기어코 30대 목표를 세웠다. '세계시민'이 되자고 정했다. 계속 생각해도 역시 웃긴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한 때 '공부방법'이란 책이 유명했다. 그 때 저자의 꿈이 세계시민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뭔가 있어보이기도 하고, 하는 일이랑도 연관되는 것 같아 그렇게 정했다. 세계시민이 되려면 왠지 기부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모름지기 세계의 일이 나의 일로 느껴야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세계를 향한 후원의 길은 다양했지만 '난민'이란 단어가 유독 밟혔다. 우리나라는 유럽이 겪고 있는 난민 문제에 너무 나몰라라 자세인 듯 싶었다. 세계의 일이 곧 우리의 내일인데 이 점에 무관심하다. 이상기온이 지속되면 개발도상국의 쌀과 설탕 농사가 망하고, 그러면 우리의 식탁 물가가 올라가게 된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는 원리다.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이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겠는가.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유엔난민기구에 기부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인터넷이 아닌 길거리에서 모금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후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분들에게도 작은 힘을 주기 위해서다.

 

 막상 찾아나서니 없었다. 생각이 실현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회사 소독때문에 일찍 나선 오늘 퇴근길, 유엔난민기구 모금 운동원들을 발견했다. 저녁 8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하지만 외면도 이런 외면이 없었다. 남자 한 명은 작은 한 숨을 쉬었고, 다른 남자 한 명은 ATM기를 나오는 여성에게로 다가갔다. 난 눈이 마주친 여자 모집원에게 갔다. 다가오는 그녀에게 대뜸, '후원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더 놀랐다. 상황파악을 한 뒤 유엔난민기구에 대해 설명을 해 주겠다 하였다. 고맙지만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어 괜찮다고 하였다. 설명하는 거 자체가 그녀를 더 피곤하게 할 것 같았다. 후원하며 알아가면 될 것 같았다. 1만원 후원하려고 했는데 기본 2만원부터였다. 한 달 커피 2잔을 줄이겠다고 생각하고 서명했다.

 

 집에 와서 브로셔를 살펴봤다. 3만원을 1년 후원 시 난민 아동들을 학교 시설에 보낼 수 있다고 하였다. 2만원 1년은 난민 가족에게 텐트 제공을 할 수 있었다. 3만원이 더 있어보였다. 조금은 아쉬웠다. 월급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다른 기부를 고민해 보리라 생각했다. 뭔가 뿌듯한 오늘로 마무리지려는 순간, 가슴 한 켠에는 또 다른 질책이 들려왔다. 그럼 '언어'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 정하였던 언어 실력 향상이 여전히 답보상태이다. 먼지만 쌓여가는 영어 문제집, 단어집을 힐끗 본다. 세계시민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영어 공부는 내일부터로 조심히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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