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기여, 잘 있거라
2달 동안의 현지적응훈련 기간 동안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우즈벡 가정에서 2주 지내는 OJT다. 이것은 의미가 상당하다. 첫째, 실제 우즈베키스탄의 가정집에 머물면서 그들의 생활을 몸소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된다. 향신료가 가득한 현지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단원들에게는 시작전부터 걱정이 앞선다. 둘째, OJT는 자신의 파견지에서 실시되기 때문에, 장차 활동하게 될 기관을 처음으로 보게 가보게 된다. 앞으로 가르칠제자들을 만나게 되고, 몸풀이 차원에서 일부 단원은 시범 강의도 해본다. 또한 자기 기관의 선임 단원, 또는 같은 지역에 먼저 적응을 하고 있는 선임 단원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특히 지방단원들은 이 시기에 직접 자기가 살게 될 곳을 골라야 나중에 편하다. 셋째, 동기 단원들과 헤어져 홀로 보낸다. 함께 밥을 먹고, 현지어 공부를 하고, 문화체험을 함께 했던 가족같은 동기들과 헤어진다.
OJT 예정인 집으로 떠나기로 한 첫날, 수도 단원이었기 때문에 숙소 앞으로 학생이 찾아오기로 하였다. 내 활동기관인 세계언어대학교의 학생이라 하였다. OJT의 가정은 일부러 파견지의 학생 가정으로 한다. 이것을 통해 2년 동안 현지의 좋은 친구를 사귀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다림도 잠시, 우즈베키스탄인 치고는 키도 키고 얼굴도 하얀 남자가 다가왔다. 내가 기다리던 '베기'란 남자였다. '선생님'이란 발음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한국어를 너무 좋아하는 학생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한국은 물론 한국어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상상 이상이었다. 베기는 나에게 우즈벡 이름이 필요하다며, 장호랑 발음이 비슷한 '자혼'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세계'라는 뜻이었고 세계언어대학교로 '자혼'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랐다.
베기의 집은 전형적인 우즈베키스탄 주택은 아니었다. 대개 한국 단원들이 불편해 하지 않도록 현지 사무소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을 물색한다. 베기의 가족들은 모두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아버지는 세계언어대학교의 교수, 큰형은 우즈벡 내의 일류 법대를 나와 판사였다. 누나 역시 세계언어대학교의 교수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큰형과 누나 모두 이혼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들과 함께 하는 우즈벡식 저녁식사는 너무 행복했다.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은 너무 많았다. 그러나 20대 당시 먹성이 엄청났던 나로서는 대부분 거의 다 먹었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베기의 형과 누나, 그리고 베기와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베기의 누나는 대장금을 너무 좋아한다고 하였다. 나에게 '오나라' 뜻을 물어보길래 어렵게 음악 파일을 구해다 주었고 뜻풀이를 해줬다. 그러자 '오나라' 음악에 맞춰 우즈벡 전통춤을 췄다. 난 그것을 동영상으로 녹화했다.
2주 동안 베기는 내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 근무지에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고, 주요 관광지를 함께 하였다. 모르는 러시아어를 물어볼 때면 항상 우즈벡어도 함께 가르쳐주었다. 베기는 2학년이었고, 내가 가르칠 학생들은 3학년 반이어서 직접 가르칠 기회는 없었다. 그래도 혼자 배운 한국어실력이 출중하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신한다는 것이었다. 상세히 가르쳐 줄라고 치면, 이미 아는 내용이라 넘어가자고 하였다. 아무래도 집안의 막내이니 응석이 많았다. 베기는 자신이 활동하는 포럼에도 같이 가자고 했고, 친구의 결혼식에도 나를 데려갔다.(우즈벡 여자들은 대개 20대 초기에 결혼을 한다.) 심지어 스터디를 한다는 이유로, 우즈벡 공영방송국에도 가 보았다.
OJT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베기의 배려 덕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베기를 가까이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래도 응석이 심했고, 내가 가르치는 내용보다는 새로운 요구가 많았다. 비지니스 한국어를 해달라, 토픽 준비를 도와달라 등 개인적인 욕심이 많았다.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바빴던 당시 상황에서 베기에게 따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아주 가끔 베기를 볼 뿐 OJT 이후로 자주 보지는 못했다. 그러던 출국을 앞둔 어느 날, 베기에게 전화가 왔다. 귀국을 축하한다는 전화였다. 나를 잊고 있지 않은 것에 너무 고마웠다. 고맙다는 말 이외에 미안해서 할 말도 없었다. 다행이 공항에 취직을 하였다고 하였다. 앞으로 한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라며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우즈벡에 어떤 친구를 사귀었나 생각할때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후회가 앞선다. 베기의 이야기를 더 들어줄걸 그랬다. 지금 네가 너무 보고싶다. 한국에서 너의 안부를 빈다. 베기여,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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