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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CA - 우즈벡(Oh! z Bek)/난 빨따리로 가련다

다 사람 사는 곳

다 사람 사는 곳

 

 여행, 미지로 향하는 것은 언제나 설렘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 표현 밖에 없는 것 같다. 콩닥거리는 심장은 몸 전체에 피를 뿜어대고, 그 에너지는 전신에 공급되어 몸을 앞으로 항해하게 한다. 다만, 봉사활동은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알 수 없는 그곳에서 2년 동안 살아야하였다. 알려진 정보도 없었기에 걱정은 배가 되었다. 누구는 추워서 얼어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 하였고, 생필품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두 싸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민 가방의 제한 무게는 25kg, 이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까가 봉사단원들의 지상 과제였다. 선배 단원과의 연락은 마치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고, 그들의 조언은 바야흐로 복음이었다. 걱정되는 것이 한 둘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해결될 문제랴. 그래서 내 짐은 단원들 중 가장 가벼웠다.

 

 공항을 나와 숙소로 가는 길, 스타렉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모두 어둠었다. 너무 어두웠다. 아무리 개발도상국이라지만 이렇게 어두울 줄이야. 나도 그랬고 동기 단원들도 말이 없었다. 8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의 고단함과는 별개로, 상상이 현실로 펼쳐지는 것에 대한 막막함이 침묵을 만들었을 것이다. 자동차 시동이 꺼진 곳은, 나름 이 나라에서는 일류대학이라는 세계경제외교대학교란 곳이었다. 그곳의 기숙사 머물며 2달간 현지 적응 훈련을 받는다고 하였다.  분명 일류대학의 기숙사라 했는데, 엘리베이터부터 고장이었다.(그 엘리베이터가 움직였어도 나는 타지 않았을 것 같다.) 6층에 위치한 우리의 방은 생각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푹 꺼진 침대, 눅눅한 이불, 그리고 생소한 화장실 변기와 샤워시설, 콘센트 모양 등이 막 꿈에서 깨어난 현실감을 부여하였다. 석회수가 섞인 물이라 그런지 미끌거리는 느낌을 뒤로 한 채, 냅다 샤워를 하고 그 침대에 몸을 맡겼다. 우즈베키스탄의 첫날은 말 그래도 '에라 모르겠다'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운영요원들이 우리들을 찾아왔다. 긴장한 표정을 보았는지 농담도 건네며 첫 일정으로 '시내 투어'를 제안했다. 스타렉스가 처음 향한 곳은 시내의 중심지란 곳이었다. 모든 게 신기했다. 이 나라에 이 정도 수준의 쇼핑몰이 있다니. 이 때부터 여자 단원들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운영요원은 돈도 놔눠주며 마트에서 뭐 좀 사보라고 하였다. 짧은 자유시간,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마트를 돌아봤다. 샴푸도 있고, 여성 용품도 있고, 음료수는 두말할 나위 없고, 과일들도 상당히 많았다. 결론은 없는 게 없었다. 첫 쇼핑이니 환타하나 샀다. 정해진 시간에 모인 우리들의 표정은 안도 그 자체였다. 이젠 우즈베키스탄에서 살 수 있다는 환희 같은 게 엿보였다고 할까. 여유가 생기니 더 많은 게 보였다. 특히 여성 단원들은 '망고'를 보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망고가 먹는 망고가 아니라 여성 의류 브랜드 상표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망고 세일'은 우즈베키스탄 전 여성단원들의 가장 중요한 핵심 정보였다.

 

 그 뒤 한국식당도 있고, 한인들이 운영하는 한국 식품 가게도 있고, 우즈베키스탄 '용산' 상가와 같은 곳에 가보게 되었다. 점점 우즈베키스탄을 접하면 접할 수록 우리의 이름 모를 두려움과 걱정이 참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기후도 그랬다. 우려와는 달리 2월 말 우즈베키스탄은 한국의 날씨와 비슷하였다. 오히려 봄과 가을은 한국과는 비교도 될지 않을 정도로 그 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순박했으며(일부 택시기사, 경찰 제외)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서인지 나에게 항상 호의적이었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이란 이름 앞에 붙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수식어만 집착을 하였던 것이었다. '개발도상국','낙후','못 사는' 이라는 말들에게 진정 보아야 할 '우즈베키스탄'이란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우즈베키스탄에 다가갈수록 나의 삶도 더 행복해졌다. 먹을 것을 걱정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정말 잘 먹었다. 과일이 풍부하고 값쌌다. 수박을 이틀에 한 번 꼴로 사다 먹었다. 먹다 질리면 참외의 20배 크기인 '듸냐'라는 과일을 사서 먹었다. 기름밥으로 알려진 '쁠롭'을 비롯하여 고기 양꼬치인 '샤슬릭'은 우즈베키스탄만이 주는 행복 아이템이었다. 와인 가격도 상당히 싸서 가끔 소믈리에 흉내고 내봤다. 재미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수영,테니스를 처음 배웠다. 단, 물에 뜨지도 못하는 나에게 시작부터 2m 깊이 수영장은 운동 이상의 생존 문제였다.(절반 넘어가면 4m로 더 깊어진다) 그리움은 우즈베키스탄 학생들과 부대끼고, 동료 봉사단원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흘려보냈다.

 

 다 사람 사는 곳이었고, 사람으로 인해 움직이는 세상이었다. 다만,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우즈베키스탄과 더 가까이 하려는 노력에 게을렀다. 후회가 너무 크게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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