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아 두껍아 새집말고 헌집이라도
해외봉사활동단원은 정말 돈을 하나도 받지 않을까. 한국국제협력단 봉사단원은 그렇지 않다. 비교적 안정적인(?) 활동비, 주거비, 정착지원금을 지원받는다. 활동비는 매달 지급받는 일종의 일비이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월별로 약 200~300달러 정도 받은 것으로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흐르긴 흘렀나보다. 이게 기억이 안 나다니!) 주거비는 월 300달러이다. 단원 시작 시 250달러였는데 상향 조정되었다. 이 두 개의 비용은 모두 현지에서 받게 된다. 수도 단원이었기 때문에 해외사무소에서 3개월마다 수령받으러 갔다.
정착지원금은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정착을 위해 매달 개인 통장으로 지급되는 돈을 말한다. 2010년 당시 월 40만원이었는데 2011년부터 월 50만원으로 조정되었다. 난 월 40만원에 해당되었다. 정착지원금은 활동기간에 비례하여 적용된다. 활동기간이 1년 미만이면 월 20만원이다. 1년이 지나야 40만원이 된다. 즉 9개월 활동하였다 중도귀국하면 180만원을 받지만 13개월을 활동하고 중도귀국을 하면 월 40만원으로 책정되어 520만원을 받는다. 당연히 중도귀국 할 단원들은 1년까지는 어떻게든 버티다가 1년이 딱, 되는순간 돌아가는 걸 선호한다.
봉사단원으로서 받는 돈 중, 가장 쓰기 힘들었던 돈이 주거비였다. 방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봉사단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근무지(또는 근무지역)와 집이다. 근무지는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않으니 그남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집은 내가 선택을 해야한다. 그리고 단원들끼리 은근 비교 대상이다. 어떤 집은 피오노가 있네, 누구네는 방이 총 몇개고 화장실이 그렇게 좋더라, 어떤 단원은 경치가 그렇게 좋다더라는 식이다. 봉사활동을 가면 움막에 전기도 없는 집에 살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는 결코 꿈에서만 살 수 있었던 집에서 2년동안 살 수 있다. 물론 천운이 따라야 하겠지만 말이다.
OJT 기간 동안, 지방 단원들은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의 집을 실질적으로 구해 놓는다. 대부분 그 지방에서 근무를 하는 선임 단원들이 부동산의 역할을 한다. 수도 단원들은 해외사무소가 주로 소개를 시켜준다. 수도 단원들을 불러 놓고 방을 보여주는데, 서로 자기가 살고 싶어하면 안 되니까 나름의 기준을 정하게 한다. 우리 동기들은 근무지에서 가까운 단원이 우선권을 갖자고 합의를 하였다. 이집 저집 같이 보면서 이건 뭐가 좋네, 저건 뭐가 나쁘네 의견을 나눴지만 서로 마음에 콕 드는 집은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여자 단원들을 현지적응훈련 기간 동안 집을 다 구했다. 문제는 나와 동기 형만 못구한 것이다. 수시로 두꺼비를 찾았다. '두껍아, 두껍아, 새집 바라지도 않으니 헌집이라도 줘라. 월세는 꼬박 줄게.'
현지적응훈련이 끝나고 남들은 자신의 집에서 근무지에 출근을 할 때, 나와 형은 봉사단원들의 유숙소(지방 단원들이 수도에 와서 머무를 집)에 기거를 하였다. 결국 내가 방을 가장 늦게, 운 좋게 구했다. 내가 정해 놓은 기준은 3가지였다. 첫째, 책상이 있어야 한다.(다른 단원들은 이게 왜 중요한지 이해를 못했지만, 나중에는 모두 수긍을 했다. 자신들은 식탁에서 책을 봐야했기 때문이다.) 둘째, 사운드 시스템을 갖췄으면 좋겠다.(음악 듣는 것을 중시했으므로). 셋째, 철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문틈에 봉을 끼워, 일종의 철봉처럼 운동을 하기 원했다. 이건 한국의 어떤 자취집에도 없을 것이다.)
황당한 이 세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집을 구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할 뿐이다. 정말 간절히 기도를 하여 우주가 도와줬던 것 같다. 특히 심혈을 기울인 곳은 내 인생의 첫번째 공부방이었다. 기존 책상과 함께 집의 가구를 재정비하여 공부방을 꾸몄었는데, 단원들은 해외사무소를 옮겨 놓은 것 같다는 찬사를 보냈었다. 일종의 개인서재에서 책도 보고 컴퓨터를 하였다. 더우면 최신형 에어컨을 틀었고, 답답하면 창 밖의 우즈벡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딱딱한 침대에 누워서 지독하게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뎠다. 그런 집에 살다 한국에 돌아왔다. 취업을 위해 구한 옥탑방의 맨 바닥에 누웠을 때, 그 시절이 일장춘몽처럼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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