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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란 말 참 좋지요/그렇게 활자를 읽은 것

‘소리’ 에 대한 끝없는 사색과 물음, 김훈의 현의 노래를 읽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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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김훈을 알린 칼의 노래에 이어 ‘노래’ 시리즈로 관심을 받았던 책으로 기억한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작가 김훈에 주목하여서 읽었었다. 조사 하나에도 온갖 심열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이 이 책에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낯선 문체와 전개방식에만 주목하였을 뿐 정작 숲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수업을 계기로, 특히 순장이 주는 죽음과 소리의 의미,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읽기로 다짐한 결과, 과연 두 번째로 책을 읽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얻을 수 있던 시간이었다.
 현의 노래에는 세 가지 길이 그려졌다 생각된다. 인간의 길, 소리의 길, 쇠의 길이 그것이다. 현의 노래는 가야의 악사 우륵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우륵을 중심으로 한 소리의 의미와 우리의 삶과의 문제를 절묘하게 풀어 나간다. 우선 소리의 이야기 전에 우리의 생의 문제를 먼저 제기한다. 가야의 왕들이 사백년 동안 묻힌 능선, 그와 함께 묻혀간 순장자들, 그곳에 묻히길 기다리는 왕과 그와 함께 묻혀야 될 운명의 사람 아라의 모습이 그려진다.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해 있는 이 공간이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신라도, 백제도, 가야도, 개포나루도, 대숲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는 개념일 것이다. 특히 아라의 배뇨욕구는 생의 가장 원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생각되었다. 오줌은 삶에 대한 욕구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오줌을 누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라는 이러한 욕구충족의 집착마저 빼앗기게 되는 운명에 처한다. 그녀는 궁을 도망치기에 이른다. 결국 순장이 되어 죽게 되는 그녀의 모습은 우륵이 말하는 소리에 대한 의미파악에 단서를 제공한다.
 우륵은 말한다. 소리는 살아있는 동안의 소리라고. 또한 소리는 덧없음이요 흐름이요 주인이 없다고 하였다. 앞서 살핀 아라를 보자. 그녀는 죽음은 이렇게 느껴졌다. 그녀가 죽음으로서 더 이상 소리가 될 수 없다. 소리는 살아있는 동안의 소리라면 우리 자신은 소리 그 자체가 아닐까. 우륵은 이것은 또 아니라 말한다. 인간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도구일 뿐 그것이 악기를 통해 실현되는 것에 지나치지 않는다 말한다. 하지만 난 왠지 이 말과는 다른 생각을 갖는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첫 호흡의 증거가 울음소리이다. 그것은 생명이 시작되는 신호이다. 죽음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숨소리, 몸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내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무언의 소리까지 아무런 소리를 낼 수가 없는 상태라 생각된다. 때문에 소리 자체가 우리의 생이라고 다가왔다. 비화라는 인물은 몸과 소리의 관계를 은연히 드러내 주는 소재다. 소리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나 머무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잠재되어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인간은 영원불멸한 존재가 아니다. 때문에 소리는 살아있는 동안의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혈육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는 존재다. 이에 소리는 계속해서 흘러가는 존재라 말하는 것이라 이해되었다. 현의 노래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물음이고 그에 대한 답변이 아닐까.
 소설은 우륵과 야로를 통하여 소리의 길이 있고 쇠의 길이 있다 말한다. 두 존재는 각자의 흐름이 있다 말하지만 결국 한가지로 보였다. 대장장이 야로는 쇠는 누구의 것도 아니라 말한다. 그에게 있어 쇠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나라의 흥망에도 초연하다. 야로의 병장기는 나라를 넘나든다. 어디에서 머무를 수 없고 존속될 수도 없는 쇠, 그리고 우륵이 말하는 소리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아니, 둘의 관계보다도 공통점이 있을 듯 하다. 이 부분에서 김훈의 칼의 노래를 떠올렸다. 한없이 순수성에 가까운 칼, 병장기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였었다. 악기와 병장기, 소리와 쇠는 똑같은 의미일 것이다. 어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유구하고 격동적인 역사 속에 살아온 존재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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