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 이 글에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엔 아주 중대한 스포일러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미리 알려드립니다.
지구를 대체할 후보지는 세 곳. 그중 쿠퍼(매슈 매코너헤이) 일행이 제일 먼저 선택한 건 밀러 행성이다. 지구에서 제일 가깝다는 이점이 있지만 블랙홀과도 아주 가깝다는 게 단점이다. 블랙홀의 중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 중력의 차이가 시간의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밀러 행성에서 보내는 1시간이 지구에서는 7년이라니. 쿠퍼는 조급해진다. 서둘러 탐사를 마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우주선으로 돌아온 쿠퍼가 지구에서 보내온 메시지부터 찾는다. 23년4개월8일. 쿠퍼가 밀러 행성에 머문 겨우 3시간여 동안 지구에 남은 이들이 흘려보낸 세월. 차곡차곡 쌓인 23년치 영상메시지가 차례로 쿠퍼를 만난다.
어느새 청년이 되어 인사를 건네는 아들의 첫번째 메시지. 흐뭇하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는 메시지. 대견하다. 첫아들 제시를 낳고 기뻐하는 메시지. 뭉클하다. 그리고 또 다음 메시지. 천천히, 아주 힘겹게 입을 떼는 아들. 어린 제시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며 고개를 떨구는 영상. 결국 거기에서 쿠퍼가 무너진다. 입을 틀어막고 오열한다. 힘들어하는 아들의 어깨도 토닥일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아빠가 필요한 순간마다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바로 그 얼굴.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쿠퍼의 얼굴. 나는 그것이 단지 우주로 떠난 사람의 얼굴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곁을 먼저 떠나간 모든 이들의 얼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하늘나라’ 같은 게 있다면,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모든 망자의 표정이 쿠퍼의 표정과 같지 않을까. 꿋꿋하게 살아가는 남은 이들이 고맙다가도, 행여 그들이 자신의 빈자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땐 꼭 쿠퍼처럼 흐느끼며 미안해하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곁을 떠난 모든 이들이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는 게 아니라, 쿠퍼처럼 ‘별과 별 사이’(interstellar)를 여행하는 것이면 좋겠다. 고인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혼자 속삭이는 메시지가 빠짐없이 그에게 가닿는 것이면 좋겠다. 우리의 남은 평생이 그곳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이면 좋겠다. 그래서 그가 미안해하고 흐느끼는 시간이 최대한 짧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먼 훗날, 떠날 때의 젊은 모습 그대로 서서 훨씬 더 늙어버린 나를 안아주면 참 좋겠다.
마냥 기분 좋은 상상을 이어가던 나는, 하지만 곧 우울해지고 말았다. 누군가의 우주에서는 ‘쿠퍼의 얼굴’이 ‘떠난 자’의 얼굴이 아니라 ‘남은 자’의 얼굴이 될 거란 걸 예감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아이들은 “별이 되어 떠난” 뒤, 아이와 같은 또래 친구들의 성장을 지켜보아야 하는 세월호 유가족. 쿠퍼의 표정은 그들이 앞으로 짓게 될 ‘미래의 표정’이다. 다른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마다, 너무 일찍 떠나버린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며 자주 무너지고 말 터인즉.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질 것이다. 4월16일 이전으로. 수학여행 떠나기 전으로. 하지만 끝내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쿠퍼의 얼굴’을 감싸쥔 채 자꾸 울먹이게 될 것이다.
“그들에겐 오늘이 11월4일이 아니라 203번째의 4월16일이다.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러니 세월호 지겹다는 얘기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 하루도 안 지난 일을 지겹다고 하는 걸까’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현실감각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 때문에 ‘내가 미쳤나. 미쳐가고 있나’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한다.”(<한겨레> 11월4일치 ‘이명수의 사람그물’ 중)
김세윤 방송작가 |
중력의 차이가 시간의 차이를 만든다. 블랙홀 곁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세월호 유가족의 삶은 2014년 4월16일로 빨려들어갔다. 맹골수도가 블랙홀이다. 우리의 시간으로는 벌써 200일 넘게 흘렀지만 그들의 우주에서는 아직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어느새 2000일이 지났지만 쌍용자동차의 시간이 여전히 2009년 5월21일에 멈춰 있는 것처럼.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의 시계가 2009년 1월20일에 멎은 것처럼.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시간’은 오늘도 저마다 다르게 흐른다. 이 서글픈 불일치의 우주를 무사히 횡단하는 최적의 궤도란 게 있을까. 나 혼자선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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