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생각하지 않으려고
지금도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단 한가지 있다. 왜 우리 동기들의 사이가 소원해졌는지 말이다. 알 수는 있을 것이다. 현재도 나와 연락을 하고 있는 동기 한 명에게 그 때의 문제를 물어보면 된다. 다만, 그러고 싶지 않다. 알아서 뭐하겠는가. 그들이 나를 용서하든, 내가 그들을 용서하든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하기사 용서한다는 단어 자체가 맞지도 않는 것 같다.
지인을 만드는 것, 평생이란 거창한 단어는 아니라도 좋은 친구를 만드는 것을 해외봉사활동의 제1 목표로 삼았다. 내 딴에는 온갖 노력을 다 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게 좋지 않았나도 싶다. 지방 단원들이 수도에 오며 내 일은 접어두고 무조건 맞이하러 나갔다. 그들이 국외로 나갈때, 들어올 때는 어김없이 공항으로 나갔다. 짐 1Kg을 더 챙길 때도, 난 교육원에서 찍은 단체사진을 액자에 넣어 현지에서 선물을 줬다. 서로의 문제가 있을 때 들어주는 역할, 풀어주는 역할을 자처했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정말 동기라는 소중한 단어가 귀국 후에도 이어지기 바랬는데 아쉬울 뿐이다.
문제가 뭐였을까 정말 많이 생각했다. 활동 종료 6개월 전이었다. 그 때부터 우리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태권도 단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문제가 뭔지 모르고 있냐고. 정말 모른다고 했고 그러면 됐다고 했다. 문제가 있긴 있었는데 정말 뭐가 문제였을까 가끔 궁금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들끼리의 문제라기 보다는 동기들과 나와의 문제였던 것이다. 귀국 며칠 전을 남기고 모두들 유숙소에 모였다. 남은 기간 추억이나 쌓자고 하였을 때 난 내가 살던 집을 고집하여 유숙소로 향하지 않았다. 그곳에 간들 서먹한 몇몇과 얼굴을 마주하기 싫었다.
귀국 날, 날 챙겨준 것은 지금도 연락을 하는 여자 단원 한 명뿐이다. 둘이 점심을 먹고 난 후, 돌아가는 비행편 시간에 맞춰 서로 모였을 때 나와 동기들과의 어색함이 가슴 한 쪽을 서리게 하였다. 2년만에 돌아온 공항에서 간단히 사진을 찍었다. 모든 연락을 끊었다. 내가 싫었으면 연락을 말지 결혼할 때는 반갑다고 연락을 해 왔다. 아예 연락을 하지 않았거나 그냥 축하한다는 말만을 전했다. 그들은 어떻게 그리 당당할 수 있을까 신기하였고 쿨하지 못한 내가 바보같았다.
이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관계 속에서 나도 좀 더 독해졌고 똑똑해졌다. 그것이라도 다행이지 않은가. 비록 배우는 데 든 시간과 마음의 비용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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