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나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어 교사로 지낸 사진들을 볼 때마다 심장 한켠이 아리다. 특히, 마지막 수업을 기념하여 학생들과 찍은 사진을 볼 때면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음을 의심한다. 10평 남짓한 아담한 교실에서 8명의 우즈벡 학생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마치 어제일 같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과 제자로서 맺어진 고귀한 추억이 있음에 감사해한다. 그러다, 곧, 섬뜩함에 눈을 껌뻑이며 사진을 다시 살핀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기억 상실증을 겪는 남주인공의 심정이 이러할까. 정작 그들 중 이름이 기억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흠칫한다. '내 세계에 그들이 과연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되물어 물어보지만 쉬이 답을 구할 수 없다.
대학교 지도 교수님이 이 모습을 보셨다면, 분명 줄리를 본받으라 말씀하셨을 것이다. 소설가셨던 선생님은 유독 '이름'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내가 그의 이름을 아는 순간, 비로소 나에게 그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 했던 시 구절과 엇비슷했다. 소설가가 알려주는 소설 잘 쓰는 비기인가 싶다가도 머리에는 와 닿지가 않았다. 애석하게도 수업은 내가 들었는만 이를 실천한 것은 줄리였다. 그녀는 그녀가 탄생시킨 병아리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렇게 그녀의 마음에는 각각의 병아리 6마리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저 노랑 병아리일 뿐이라며, 앙계장에서 돌을 던져 죽게 만들었던 6살의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난 애초부터 제자들의 이름 하나 기억 못하는 나쁜 선생인 것이 당연하다. 우즈벡에 봉사활동을 가는 순간부터, 내 속마음은 이미 새로운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거대한 장막을 쳤었다. 그것 대신에 못다한 취업 준비나 하면서 나만을 위한 투자에만 몰두하였다. 한국어 수업 시간도 다를 게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별도의 보충 수업이나 특별반 개설을 요청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주말에 학생들이 시내 여행을 하자고 하면 선약이 있다는 거짓말만 하였다. 약간의 친절함을 베풀면, 다른 것을 더 요구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어차피 곧 한국으로 돌아가니 학생들과 깊은 관계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우즈벡과 나 사이의 맺어진 관계는 존재하는게 없다.
다만, 아직은 플라타나스 한 그루를 심을 시간이 있다고 믿는다. 장애가 있는 삼촌을 직접 보고 온 줄리는 삼촌이란 존재가 이제는 가족이 되었다고 말이다. 세상과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주저함이 없는 그 모습을 닮기 위해서일까. 이제야 정신차린 남주인공이 플라타나스를 심으며 영화는 끝맺는다. 남주인공의 이 마음에 동기화한 나 또한 더 큰 세상을 바로보기 위해 플라나타스를 심고 싶다. 내일 출근 인사를 건네는 후임들에게는 반드시 얼굴을 보면서 답례를 하고, 금주 주말은 (생애 최초) 엄마가 아닌 아빠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전할 것이다. 결혼식 후 연락을 두절시킨 선배들 소식도 궁금해진다. 하오나,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20대와 사내연애를 하는 내 친구 경무만은 예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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