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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란 말 참 좋지요/그렇게 활자를 읽은 것

정희진의 어떤 메모_한겨레 8월 2일자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작사, 김종률 작곡, 1981

무슨 책을 감명 깊게 읽었느냐, 어떤 글귀가 가장 인상적이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상황에 따라 다르고 자주 바뀌어서 대개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지만 실은, 있다. 내 인생의 ‘말씀’은 가수 태진아의 노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다. “그건 책이 아니잖아요?”라고 의아해하거나 농담으로 웃어넘기는 이들도 있지만 내겐 심오한 인생 요약이다. 관계는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최근에 정한 두번째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원래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가사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라고 한다. 동지는 간데없고 찢어진 깃발만 나부끼는 스산한 풍경. 슬픔과 좌절의 절대적 외로움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묘한 낭만이 있다.

열아홉살 3월, 이 노래를 처음 접했을 때는 부르는 것도 듣는 것도 어색했다. 너무 비장했고 무엇보다 뜻을 몰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니. 사랑하는 사람과는 조용히 걸으면 되지, 무슨 행진을 한단 말인가. ‘임’은 또 조국? 입시교육의 후유증 때문인지 나는 냉소했다.

그러다가 세월호 이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는 삶이 보통 경지가 아니구나,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어린 희생자들에게 빼앗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세월호의 유례없는 충격은 살릴 수 있었다는 회한, 모든 국민이 실시간으로 사건을 함께 겪은 경험, 희생자 대부분이 고등학생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평소 나는 연소자든 연장자든 연령에 따른 다른 시선(차별)을 싫어했다. 삶의 매순간은 다 소중하고 균질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꽃다운 청춘”, “인생은 60부터”, “요절”처럼 나이와 가치를 연결 짓는 모든 언어에 비판적이었다.(생애주기 자체가 자본주의 산물이다.)

10대의 죽음이라는 이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매일 <한겨레>에 실리는 학생들의 얼굴과 글을 읽는다. 나이의 의미와 작동을 무시하고 살다가 ‘사람이 죽는 나이’는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10년도 못 살고 학대로 사망하는 아이들이 있다. 혹은 10대의 죽음은 기억하는 이가 적어서 기억의 장소가 좁아서, 생명의 원래 자리인 어머니의 가슴밖에 묻힐 곳이 없는 죽음이다.

다시 ‘행진곡’으로 돌아가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영혼, 존재감 없는 존재, 스스로 몸 둘 곳을 없애 고스란히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려는 삶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것, 모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지우는 것은 최후의 혁명이다. 불멸을 사려고 전쟁, 돈, 명예, 업적을 얻고 싶은 욕망은 가장 근절하기 어려운 권력 의지다.(나의 글쓰기도 이런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세월호로 타살된 이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삶에 대한 고민 자체를 빼앗겼다. 이 사실이 가장 나쁘다. 존재 이전에 존재의 의미를 없앤 것이다. 유목과 무명의 인생을 고민하고 설레어하고 마침내 그렇게 살다가, 홀로 황량한 언덕에 서 있는 삶도 영광이다. 삶과 죽음의 가장 큰 차이는 가능성이다. 행이든 불행이든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가능성. 인간은 행복이 아니라 가능성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래서 너무 일찍 죽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우주에서 보면 인간은 하루를 사는 곤충이나 길가의 이름 모를 풀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우주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산다. 이름을 얻으려고 발광하다가 타인까지 질식시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드물지만 흔적을 지워가며 사는 이들도 있다. 나 역시 미숙한 범죄자처럼 가는 곳마다 뭔가를 흘리고 다니지만, 나는 욕망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는 삶을.

며칠 전 통장을 갱신하러 은행에 갔다가 금융상품을 선전하는 포스터를 보았다. 평생 연금 지급을 보장한다는 유의 내용이었는데, “평생” 괄호 안에 “110세”라고 쓰여 있었다. 인명 사고를 생산하고 방치하는 내전의 시대 동시에 장수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남기지 않고 살 것인가.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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