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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아버지와 어린 아이와 당나귀

 아버지와 어린 아이와 당나귀

 

 어렵게 지하철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펴고 의자에 등을 기댈 찰라, 다음 역에서 아주머니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들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섰다. 모른 척 하고 휴대폰만 보려다가 그러면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저 작은 여자아이가 먼 훗날 나를 부양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여기 앉으세요'라고 못내 친절한 척 자리를 양보하려 일어섰다.

 

 사람의 도리로서, 강호의 의리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고맙습니다.' 정도는 최소한 기대했다. 아주머니의 말은 의외였다.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 역에서 내리기 때문이라면 다시 앉았겠지만 그런 말도 없었다. 남자가 칼을 뽑았다던 무라도 썰어야 한다 했던가. 자리를 양보하러 일어났다면 그 상대를 내 자리에 앉혀야했다. '괜찮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아예 지하철 출입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한동안 아주머니와 어린 아이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순간 답답한 감정이 치밀었다. 빈 자리를 저렇게 쳐다만 보다가 다른 사람이 앉기라도 한다면 왠지 내가 우스울 것 같았다. 뭔가 이건 아니다 싶으셨는지 아주머니가 나를 한 번 SSG(쓱!) 처다보시더니 아이에게 앉으라 하였다. 아이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다. 자신은 앉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엄마에게 앉으라고 하였다. '그냥 아주머니 무릎에 애를 앉히세요!'라고 하려다가 곁눈질로 바라볼 뿐 휴대폰 보는 척만 하였다. 결국에는 아이가 앉는 쪽으로 정리가 되었다.

 

 빈 자리를 놓고 서로 양보하고 고심하는 모습에서, 지금까지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엣날 이야기가 하나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어린 아이와 당나귀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린 아이가 당나귀와 함께 어딜 간다. 처음에 동물과 사람이 나란이 걸으니 주변에서 뭐라 한다. 당나귀는 대체 뭐에 쓸 거냐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태운다. 사람들이 아버지는 걷고 어린 아들은 편안히 가는 것에 뭐라 한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당나귀에 타자 아동 학대라 수군거린다. 둘이 탄다. 동물학대라고 뭐라 한다. 답은 있는 이야길까. 아직도 모르겠다.

 

 X파일의 CIA 멀더 요원이 말하길 진실은 항상 저 넘어에 있다지만, 아마 백석 시인이 위 이야기의 정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시인은 일찍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빼어난 시를 썼기 때문이다. 백석 시인에게 꿈 속에서 묻든 혹은 나타냐가 나를 좋아해 응앙응앙 울 것이라는 당나귀라도 되어서라도 저 답을 꼭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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