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빅터 프랭클의 심리의 발견>, 빅터 프랭클 지음
강윤영 옮김, 청아출판사, 2008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붙어 다니는 단어 중 하나가, 무조건이다. 두 가지 문제가 겹쳐서 발생한 현상이다. 하나는 무조건(un/conditional)에 대한 오해고, 오해가 풀렸다 해도 무조건은 불가능한 인간의 조건이다.
무조건은 어떤 걸림도 없는 투명한 세계 같지만, 진공 상태인 우주에서도 무조건은 없는 물리다. 조건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정황을 의미한다. 당연히 조건 없는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사람들 특히 남성은 사랑이나 섹슈얼리티 영역에서는 인간을 ‘동물적 동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동물도 자연 환경과 상대방의 조건에 맞는 사랑(번식)을 한다. ‘동물적인 동물’은 사회를 만들고 정치를 하는 인간밖에 없다.
상대방을 만나고 알게 되는 과정은 어떤 틀 속에서 벌어진다. 그 구조가 현실이 아닐 때, 판타지라고 말한다. 가족이나 이성애처럼 제도이기도 하고 관계를 맺게 된 계기나 상대방에게 느끼는 감정은 문화적 각본의 산물이다. 사랑의 가장 정확한 개념이자 지향은, 조건적이다. 여기에는 “조건에 맞춰 결혼했다”, ‘조건 만남(원조 교제)’의 그 조건까지 포함된다. 조건이 교환에 국한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뿐이다.
유대인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3년간 감금되었다가 살아남았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집에 있는 번역본만 3개인데 검색해보니 6권 이상이 출간되어 있다. 평소 주변에 많이 권하는 책이고 독후감도 무궁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 <심리의 발견>에 손이 갔다. 이 책은 가벼운 팝 사이콜로지(대중 심리학), 요즘 한국말로 하면 힐링 계열의 책이지만 궤도가 다르다. 위로보다 인식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로고테라피(logo/therapie)라고도 불린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영어 제목도 ‘의미를 찾아서’(Man’s Search for Meaning)이다.
프랭클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인간은 항상 자기 외에 무엇인가를 향해 헌신하고, 스스로를 넘어서 다른 대상에게 향한다.
책은 불면증, 건강염려증, 불안, 사랑 등 현대인의 심리적 고민을 다루고 있는데 나는 사랑에 대한 논의가 좋았다. 사랑의 조건은 상대를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시각 장애에 대한 비유가 불편하지만) “사랑이 사람을 눈멀게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랑은 비로소 눈을 뜨이게 하고 심지어 미래를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알아보는 가치는 현실이 아니라 가능성이니까요. 아직은 그렇지 않으나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인지 기능이 포함됩니다.”(111쪽)
일단, ‘조건적’은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를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랑의 의미가 다양한 것이 아니라 조건의 의미가 다양한 것이다. 결혼 시장에서 말하는 조건은 개인의 개별적인 고유성이 아니라 세상이 요구하는 공통 조건을 말한다.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 행동이다. 나쁜 사람보다, 알 수 없는 사람이 더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다. 실연과 상실의 후폭풍이 너무 커서 인생이 폐허가 되는 경우는 사랑의 인지 기능으로 인해, ‘포맷’하기에는 공부한 양이 너무 많고 아깝기 때문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
더불어 흥미로운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한다. “환원주의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에 불과하다’는 말버릇”(23쪽)이다. 나도 자주 쓰는 표현이라 웃었다. 다른 하나는 홀로코스트 당시 유명한 일화로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장 다음 날 아침 1천명의 젊은이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될 예정이었는데 그날 밤 수용소 도서관이 털렸다. 죽으러 갈 젊은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책을 꾸러미에 챙겨 넣은 것이다. 정신적 비상식량으로”(211쪽). 나는 눈물이 났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의미다. 돈과 권력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다. 최고의 의미는 내가 타인의 앎의 노력 대상이 된다는 것(사랑받음), 그리고 상대를 알려는 노력이다(사랑).
정희진의 어떤 메모 중에서
'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 > 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년 목표 (0) | 2015.02.16 |
---|---|
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도돌표이를 위하여 (0) | 2014.07.21 |
사랑은 조건적 (0) | 2014.05.18 |
이제 형도 아실거예요. (0) | 2014.02.27 |
우리사회의 등불이 된, 기자인 친구에게 (0) | 2014.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