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 이 글에는 영화 <비긴 어게인>의 일부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안 보신 분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왜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엔 낭비인가요?”(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영화 <비긴 어게인>의 삽입곡 <로스트 스타스>(lost stars) 가운데 이 가사가 흘러나오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춘을 낭비해버린 청춘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어영부영 탕진해버린 나와 달리 다행히 아직 여분의 청춘이 남아 있는 영화 속 그레타(키라 나이틀리)를 열심히 부러워했다. 그리고 응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청춘을 가장 청춘답게 살아내는 그레타를 보는 것만으로 괜히 뿌듯했다. 그래서 더더욱, 영화의 마지막 순간 데이브(애덤 러빈)의 공연장으로 달려가는 그녀가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주길 바랐다.
무대 위에서 데이브가 노래한다. 무대 아래에서 그레타가 바라본다. 무대로 올라와 함께 노래하자고 눈짓하는 데이브. 흔들리는 그레타의 눈빛. 하마터면 나는 이 대목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칠 뻔했다. “안 돼, 그레타! 제발 올라가지 마!”
다행히 그레타는 생각이 깊은 여자였다. 무대로 올라가 데이브와 화음을 맞추는 대신 그대로 공연장을 빠져나와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그레타는 데이브에게 멋진 노래를 선물했고 데이브는 그녀의 노래에 열광하는 청중을 그레타에게 선물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각자 자신만이 해줄 수 있는 선물 하나씩을 건네고 쿨하게 헤어지는 연인. 근래 영화에서 본 가장 근사한 이별이었다.
그때 그레타가 단지 데이브와 작별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브를 사랑했던 자기 자신과도 헤어진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대책없이 사랑하고 무언가에 정신없이 몰두했던, 자신의 서툰 청춘과도 멋지게 이별한 것처럼 보였다. 많이 사랑하고 또 많이 미워했던 한 남자. 많이 기대했고 그래서 더 실망했던 한 시절. 그 둘 모두를 공연장에 남겨두고 미련없이 돌아 나온 뒤, 그레타는 비로소 다시(again) 시작(begin)하는 출발선에 설 수 있었다.
이제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내 인생이지만 나에게도 한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시간들이 있었다. 몇달째 월급을 받지 못하면서도 마치 몇달치 월급을 미리 당겨 받은 사람처럼 마냥 신나서 일하던 시간. 내 글이 처음 실린 잡지를 누가 좀 봐주길 바라면서 슬그머니 지하철 선반에 두고 내리던 시간. ‘돈 되는 일’보다는 뭔가 ‘재미있는 일’을 찾아 헤매던 시간. 누군가를 대책없이 사랑하고 무언가에 정신없이 몰두했던, 말하자면 내 청춘의 시간. 하지만 나는 그레타와 달리 그 시절과 그리 멋지게 작별하지 못했다. 나는 내 청춘에게 일방적으로 차였다. 그래서 자꾸 미련이 남는다. 이렇게 생기 넘치는 청춘영화를 볼 때마다 샘이 난다. 끝내 내 것이 될 수 없는 그들의 반짝이는 시간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러시아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한 말을 요즘 입에 달고 산다. 이미 다른 지면과 여러 방송에서 내가 인용했지만, 오늘, 한 번만 더 옮겨 적는다.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비긴 어게인>을 본 200만명의 관객도 같은 이유로 영화관에 갔다고 나는 믿는다. 누구는 이 영화의 흥행이 순전히 ‘음악’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의 삶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놓쳐버린 시간’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니까. 내가 ‘아직 성취하지 못한’ 상상의 시간을 먼저 성취해버린 이들이 부러운 게 당연하니까. ‘왜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엔 낭비인’지를 절감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청춘을 정말 알뜰하게 살아내는 그레타가 더욱 기특해 보일 테니까.
김세윤 방송작가 |
그래도 여전히 이야기가 너무 뻔하고 빈약하다는 지적에 나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레타가 바에서 처음 부르는 노래와 같다고. 뻔한 멜로디, 빈약한 사운드, 맥 빠진 보컬. 그런데 여기에 드럼이 들어오고 키보드가 받쳐주고 현악기가 얹히면서 제법 근사한 노래로 변해가지 않는가. 마찬가지다. 뻔한 이야기라도 뉴욕이 더해지고 배우가 받쳐주고 음악이 따라오니 이렇게 근사해진다.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이 영화를 보았지만 곧 세 번째 보게 될 것 같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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