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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생각을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당일 연차를 쓰다

 당일 연차를 올렸다.당일 연차를 쓴 건 처음이다. 10년 넘에 이 회사를 다니면서, 당일 지참은 올렸었지만 아예 휴가를 쓴 건 처음인 것이다. 어제 퇴근길부터 목 부분이 묵직한게 신경을 제법 긁었다. 이렇게 잠복기를 거쳐 나타난 목감기는 처음이었다. 퇴근을 하고 와서 별 일 없이 바로 잤지만, 새벽의 짧은 쉼으로 이게 나을리가 없었다. 나이도 있으니 말이다. 새벽 출근 시간 30분전, 여러 생각이 났다. 오늘 용역 보고서를 봐주기로 했고, 나 또한 몇몇 보고서를 처리해야 했다. 컴퓨터를 켜고, 몇 번의 인증을 거쳐 그룹웨어 접속을 하니 그렇게 까탈스런 메일은 없었다. 해서, 그냥 연차를 올렸다. 그리고 부장님 출근시간에 카톡 하나 보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누구나 다들 알고 있다. 회사에서 본인이 제일 필수 인력인 것 같으나 실은 어찌 회사는 다 돌아간다는 것을 말이다. 육휴에 나선 남자 후임 두 사람도 회사를 짐짓 걱정하지만 쓸데없는 기우다. 벌써 회사는 그 후임들이 알아서 또는 몰라도 어찌되었든 일들을 해내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수준을 낮추면 된다. 자칭 에이스란 사람이 한 기준을 그 후임이 좀 낮춰서 하면 된다. 퀄리티가 떨어진다고? 그건 뭐 유수 인력을 키우지 못한 윗사람들의 잘못이다. 아니면 그 일 자체를 조정할 수도 있다. 없애는 방법도 있고. 이래저래해서 본인 빠진다고 회사 걱정하는 건, 마치 내가 로또를 맞을 것 같아 구매를 하지 않는 생각과 같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첫째, 진짜 좋았다. 초,중,고..그리고 대학 수업도 왠만하면 다 출석하였던 나로서는 이런 기분이 낯설었다. 둘째, 진짜 출근 시간이 길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시계를 보면서 '아직도 회사에 도착할 시간이 아니네'란 생각만 들었다. 셋째, 역시나 나 없어도 오늘 하루 큰 일 안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휴가에 연락드려 죄송하지만'으로 시작되는 카톡 메시지를 받지 않았다. 하루인데 뭔 일이나 날까 싶기도 하고, 나하나로 뭔일 난다면 그건 팀 자체가 이상한거지.

 

 앞으로는 점점 더 일 보다는 나를 우선 여기겠다. 마침 시간 외 근무 시간의 최대치도 줄어든다고 하니 말이다. 아, 그리고 이 회사를 그만 둘 수 있도록 뭔가의 능력 하나는 추가해야겠다. 능력은 열매지. 남은 시간 오랜만에 원피스가 땡긴다. 뭘 할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당일 연차를 쓴 오늘은 푹 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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